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O Dec 24. 2021

글감 나왔네

주제 글쓰기에 대하여

며칠 전 팀 후배가 지각할 뻔했다고 했다.

아침에 준비해서 지하철역에 갔는데 ID와 카드(교통카드 겸 신용카드)가 없었다는 거다. 원래 항상 가방에 넣어 두는데 그 전날엔 외투 주머니에 넣었던 것 같고, 그 날은 하필 다른 외투를 입고 와서 초래된 일이었다.

남편에게 전화하여 ID와 카드 좀 갖고 지하철로 나와 달라고 했더니 남편이 말하더란다.

"자고 있는 애는 어쩌고?"

후배에겐 5살 아이가 있다.

후배의 남편이 개인 사업을 하고 있어서 시간의 구애를 덜 받기 때문에 아침엔 남편이 아이 유치원을 보낸다.

후배는 "그냥 자는 애 들춰 안고 차에 태워서 좀 나오라고!"

라고 급하게 말했는데 남편은 계속 아이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후배는 급하게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래도 남편이 중간엔 나오겠지 기대하며 전화를 또 했다.

"어디야? 뭐 해?"

"응. **이 세수 시키고 있지."

후배는 너무나 화가 나서

"지금 뭐 하는 거야? 무슨 세수까지 시켜? **이 TV 틀어주고 잠깐 나오면 될 거 아냐."라고 소리를 쳤고, 그제서야 남편은 놀라서 허겁지겁 뛰쳐 나왔다고 한다. 후배는 남편에게서 ID와 카드를 건네받고 뛰기 시작하는데 남편이 해맑게 외쳤다.

"넘어져. 천천히 가."

후배는 순간 저 사람의 느긋함에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며 나에게 말해 주었다.


나도 불과 얼마 전에 지각할 뻔한 기억이 있어서 지각할 뻔한 쫄림이 어떤 기분인지 철저히 이해했다.

ID를 태그한 시간이 출근 시간에서 1초라도 늦어지면 바로 근태 이상 메시지가 근태 담당에게 전해지고 지각자는 지각 사유서를 써서 팀장과 상무에게 결재를 올려야 한다. 그 과정이 상당히 아찔하고 피곤하므로, 지각이다 싶으면 오전 반차를 내는 게 보통이다.  


집에 와서 나의 남편에게 깔깔대며 후배가 지각할 뻔한 이야기를 하였다.

남편이 재미있게 듣더니 말했다.

"글감 나왔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남 얘긴데."

"뭐 어때? 허락 받고 써."

"강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너무 단편적이야."

"뭐, 네가 쓴 글 단편적인 거 많더만?"


요즘 남편에게 재미난 얘기만 하면 남편은 말한다.

"글감 나왔네."

그 말을 듣고 나면 이상하게 강한 반발심이 든다.

아니, 난 그 이야기는 안 쓸 건데?


글쓰기란 대체 무엇이기에 남들은 별 관심도 없는 나만의 얘기는 털어놓고야 싶고, 남이 재미있을 거 같다고 말하는 얘기는 썩 구미에 당기지 않는 걸까?


얼마 전에 민현 작가님이 작당모의 연말 결산에 대해 쓰신 글이 떠올랐다.

진샤 작가님이 주제 글쓰기는 생명이 단축되는 느낌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다가 민현 작가님에게 같이 <작당모의>에서 주제 글쓰기를 하자고 제안하여 <작당모의>에 합류해 글을 쓴 지 다섯 달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주제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같았다. 나는 안 되겠다.

익숙하지 않은 주제, 강하게 마음에 와닿지 않는 주제에 대해 쓴단 건 암만 노력해도 안 될 것만 같다. 상상만 해도 '생명이 단축되는 느낌'이 아니라 '생명을 지속할 수 없는 느낌'이다.



나는 나에게만 중요한 이야기를 쓴다.

쓰고 싶은 이야기도 이랬다 저랬다 한다.

단편적이고 깊이도 얕다.

그래서 브런치의 조회수도 고만고만 하다.


남이 써달란 주제는 못 쓸 것 같다.

결국은 늘 내 맘대로 내가 끌리는 얘기로만 쓸 듯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읽어줬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재미있게.


+ 결국 남편이 제안한 글감을 이용해 쓰고 말았네. 부들부들.

후배에게 허락은 받지 못 했다. 허락 받으려면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데 그건 넘나 부끄러운 것.

작가의 이전글 짧은 점심 외출 후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