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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Jan 01. 2022

꿈은, 미니멀리즘

산 지 20년이 넘은 책상을 버렸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대학원 시절까지 함께 한 책상이었다.

심지어 결혼할 때 신혼집에까지 용달차를 불러 실어 왔던 책상이니 아주 오랜 친구였다.

이 책상에 앉아 고등학교 내신과 수능 공부, 대학 중간 기말시험 공부, 입사 후 진급 시험 공부부터 일기 쓰기, 리포트 작성, 싸이월드, 채팅 등등 많은 일을 하였다.


사실 아이들이 태어나고부터는 그 책상에 앉은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책상 위아래로 많은 물건이 쌓인 지 몇 년이 됐기 때문에 앉을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창고로 전락해버린 책상을 보면 늘 한숨이 나왔다.

잡동사니들이 왜 이리 많은 건지.

아아, 나는 미니멀리스트로 살고 싶은데.

물건도 정리하고 책상도 버려야지, 결심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둘째에게 방을 만들어주기 위해 남편 방을 비우기로 했다.

남편 방이라 쓰고 서재와 창고 그 사이 어딘가라고 부르는 게 적당한 공간이다.

책과 컴퓨터와 프린터가 있어서 남편이나 내가 일하기에 적합한 환경이나, 그에 어울리지 않는 잡다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쨌든 아이에게 방을 만들어 주기 위해 나의 오래된 책상과 책장을 버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책장에서 책을 다 꺼내고 책상 위아래에 놓인 잡동사니를 한켠에 치웠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 확실한 책을 버리고, 다시는 쓰지 않을 물건들도 버렸다.

사진을 찢어 버리고 기한이 지난 자격증과 성적표도 찢어 버렸다.


이 참에 근 10년을 쓰던 매트와 유모차도 버리고, 결혼하면서 남편이 샀던 홈시어터도 버리기로 했다. 한 개의 스피커와 네 개의 기다란 스피커가 세트인데, 기다란 스피커가 걸리적거려서 아이들이 태어나고선 써본 적이 없다.


"난 진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싶은데. 물건 없이 깔끔하게 살고 싶어."

내가 말하자, 남편이 코웃음을 친다.

나의 남편은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매년 미모를 갱신하고 있다고 말해주거나 (사실무근), 지적이고 현명한 여성인 나와 결혼하길 잘 했다는 말을 종종 한다. (약간의 사실을 기반으로 함)

그러나 내가 '미니멀리즘'이란 말만 꺼내면 그 말엔 절대 동의할 수 없는지 매번 코웃음을 치곤 한다.


집이 엉망이면 발을 동동거리며 먼저 움직이는 쪽은 나다.

문제는 내가 치우면 별로 깨끗하지 않다.

나는 깨작깨작 정리하다 금세 무기력증에 빠진다.


남편은 최대한 집이 어질러지길 기다린 후 움직인다. (본인도 많이 어지럽히는 데 일조한다.)

고수는 나중에 등장하는지 내가 지쳐갈 무렵 일에 착수하여 후다닥 집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그러니까 나는 '깔끔한 사람'은 확실히 아니다.

그러나 '미니멀리스트'임은 분명한데, 남편이 자꾸 아니라고 하니 한 번쯤은 이 자리를 빌어 내가 미니멀리스트임을 피력하고자 한다.  




나의 남편은 쇼핑하는 걸 좋아한다.

전자기기를 살 땐 기왕이면 최신 버전을 사야 한다는 주의이고,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자잘한 물건 이것저것 사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내키는 만큼 쇼핑을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을 터이나, 내 눈치를 보느라 남편은 쇼핑을 최대한 자제한다.


나는 쇼핑이 싫다. 나에게 쇼핑은 즐거움이 아니라, 다 떨어진 필요한 걸 채워야 하는 의무이다.

'에효, 로션 다 썼네. 시켜야겠네.'

'옷 사기 귀찮은데 입을 옷이 마땅치 않네.'

쌀 떨어져서, 휴지 떨어져서 사는 것마냥 옷도, 화장품도 내게는 다 그런 느낌이었다.

쇼핑한 물건이 택배로 오길 기다렸다가 택배 기사를 버선발로 맞이했다는 사람들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학생 때 동생과 한 달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나와 동생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싸웠는데, 싸움의 이유는 동생이 기념품을 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짐 늘어나게 강아지 가방을 왜 사?"

"기념이 되잖아."

"아니, 그게 무슨 기념품이야? 부피 차지하게 왜 사냐고?"

"이 물건은 여기서밖에 안 팔잖아."

쇼핑이 여행의 소소한 즐거움인 것을 그땐 알지 못했다. (지금도 사실 알지 못한다.)


생각해보니 난 쇼핑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물건을 수집하는 게 싫은 것 같다.

여행을 가서 남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호텔 어메니티 샴푸, 린스 등을 챙기는 일이었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싫었다.

"그 샴푸랑 린스 챙겨가도 집에선 잘 안 쓰잖아."

"헬스장에 가져가서 쓰면 얼마나 유용한데."

"자기 헬스장 등록하고 운동 안 가잖아."

"어허. 하여간 챙기면 다 쓸모가 있어!"

 돈 주고 사는 게 아니고 공짜로 제공되는 물건을 챙겨오는 건데도 나는 그냥 집에 어떤 물건을 들이는 게 싫었다.

'미니멀리즘'이란 단어도 모를 때였는데 그런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고 싶다는..


요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감히 비워야 한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난 비우질 못하니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는 듯도 하다.


나는 모으기도 싫지만, 버리기도 싫다.

플라스틱 장난감, 오래된 옷, 책과 노트 등 재활용으로 버린다고 내다 놓지만 그게 확실히 제대로 재활용이 되는지 미지수다.

안 버릴 순 없어 내놓는데 마음이 참으로 불편하다.

특히나 대형 폐기물을 버려야 할 땐 저 큰 물건을 어디로 가져가서 어떻게 처리하는지 걱정이다.

남들이 내다 놓은 소파, 침대, 장롱 등에 한숨지을 때가 많다.

버려진 가전기기를 보는 것도 싫다.

요새 가전은 고쳐 쓰느니 새로 사는 게 낫다고 하는데 고쳐서 오래 쓰게 만들어야지, 자꾸 새 것을 사도록 유도하는 것이 싫다.


TV에서 연예인들 옷장이 나올 때 옷으로 가득 찬 옷장을 보면 과식을 한 것처럼 속이 답답하다.

가끔 옷장을 비워서 좋은 옷을 좋은 곳에 기부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 옷이 제대로 쓰임이 있을지 걱정이다.

그런 특이한 옷들을 누가 입겠냔 말이다.

(누군가 잘 입고 계시다면 사과드립니다.)




잠시 눈을 돌려보니 집이 엉망이다.

치워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개켜야 할 빨래가 쌓여 있고, 거실엔 장난감이 널브러져 있다.

그렇지만 움직이기가 싫다.

아아, 그냥 이렇게 앉아 있으면 안 되겠니?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미니멀리스트도, 환경주의자도 아니다.

단지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살고 싶을 뿐이다.

내가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은 행동을 미니멀라이즈하는 것이다.

* 제목은 은모든 작가님의 소설 <꿈은, 미니멀리즘>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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