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그 남자네 집>을 읽고
나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준칫국을 맛있게 먹다 말고 맛도 맛이지만 손질이 그렇게 까다로운 음식을 마치 콩나물국 먹듯이 예사롭게 먹는 그들 모자에게 이상한 이질감을 느꼈다.
낯선 풍습과 불화하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또 한 계절이 가고 선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벌써부터 벼가 누렇게 익을 무렵에 장이 꽉 찬다는 참게장 담글 궁리를 하고 있었다. 게장용 진간장까지 따로 담가놓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생전에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시집의 식도락에 절망감을 느꼈다. 먹는 것 외의 딴생각을 하고 살 순 없는 것일까. 나는 딴생각을 하기 좋아하는 집안에서 자랐다. 어떤 것이 더 옳은지 비교할 생각은 없었지만 딴생각을 하는 게 나에게 더 맞는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어서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었다. 민어를 아무리 잘 요리해도, 양곱창을 아무리 잘 손질해도, 그 맛의 극치나 진수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민어는 민어맛을 벗어날 수 없고, 소 내장은 결코 은근한 소똥 냄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기가 굴비됐다고 해서 조기맛과 딴맛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민어맛이나 준치맛의 궁극까지 도달했다고 해서 어쨌다는 것일까. 누가 상을 줄 것도 아니고 인간이 신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고작 혀끝에서 목구멍까지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딴생각을 할 수 있다면 딴 세상이 열릴 것 같았다.
이런 것이 문화의 차이라는 거구나. 나는 내가 시집와서 느낀 어떤 이질감하고도 비교가 안 되게 혐오스러운, 그러나 개선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길이 미리 원천봉쇄돼버린 것 같은 시집의 이상한 풍습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중략)
문화의 차이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가 아니라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내 것보다 저급한 것으로 얕보고 동화는 물론 이해까지도 거부하는 태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