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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Feb 26. 2022

공감의 문학

박완서, <그 남자네 집>을 읽고

독신주의나 비혼주의까진 아니었지만 결혼이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주변에서 나에게 "너 독신주의야?"라고 하면 "그건 아니고 난 공평한 가정생활을 바라는 이상주의자일 뿐이야.'라고 대답하곤 했다. (내가 결혼할 당시엔 '비혼주의'라는 말보다 '독신주의'가 많이 쓰였다.)

 

오래 연애하면서 남자친구(현 남편)에게 계몽 활동을 펼쳤다.  

예를 들어 남자친구가

"결혼이 왜 하기 싫어? 내가 집안일 많이 도와줄게."라고 하면

"아니지. 집안일은 누가 누굴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지."라고 바로잡았다.


과장을 좀 보태어 난 결혼하면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연애 기간 수행한 계몽 활동 덕이었는지 결혼하고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때 "이래서 내가 결혼하기 싫다고 했잖아."라고 남편을 탓할까 봐 두려웠고 결국 그렇게 헤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결혼하면 안정이 되고 좋아."라는 기성세대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남편과 신혼 때 집안일로 많이 싸웠다. 요즘도 집안일의 불균형이 느껴진다고 느낄 때 내가 싸움을 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남편이 대화할 만한 상대라는 것이다. 나의 '계몽활동'도 잠재력을 가진 남자였기에 통한 것이라는 결론이다.   


이런 비교적 순조로운 결혼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시댁이었다.

시부모님은 참 좋은 분이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시댁에 가면 불편했다. 이상하고 거슬리는 부분들이 눈에 자꾸 들어왔다. 그런 불편함은 결혼 준비부터 시작되었다. 시댁에서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내가 보기엔 '허례허식'인 경우가 있었다.


결혼하고 시댁에 가면 음식은 어머님이 다 해놓으시고 나는 과일 깎기와 설거지만 하면 되었는데 그래도 이상하게 피곤했다. 내 집에선 집안일하던 남편이 시댁에 와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배 아파서이기도 했지만 그건 생각보다 비중이 큰 부분이 아니었다. 나를 피곤하게 만든 건 대화였다. 시부모님이 큰 의미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도 몇 마디가 귀에 팍 거슬리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을 볶았다.

"그런 말씀은 왜 하신 거야? 자기는 거기서 왜 그렇게 대답을 한 거야?"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 나는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남편은 내가 자신의 부모님을 욕한다는 생각이 들어 발끈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우린 싸웠다.


제사라도 있는 날이면 싸움은 더 커졌다. 제사는, 나는 결혼하기 전에 한 번도 드려본 적 없는 제사는 내가 수용하기 힘든 의식이었다. 몸이 힘든 것보다 제사의 당위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내 정신이 힘들었다.


'어머님, 아버님은 좋은 분인데 내가 이상한가? 내가 꼬여서 나만 불편한 거야?'라는 생각은 지나고 보니 남편과 내가 자라온 환경이 달라서였고 집안의 분위기가 달라서였다.



박완서 작가님의 <그 남자네 집>을 읽고, 주인공이 결혼 직후 집안의 문화가 달라서 느꼈던 심적 괴로움에 어찌나 공감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준칫국을 맛있게 먹다 말고 맛도 맛이지만 손질이 그렇게 까다로운 음식을 마치 콩나물국 먹듯이 예사롭게 먹는 그들 모자에게 이상한 이질감을 느꼈다.
낯선 풍습과 불화하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또 한 계절이 가고 선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벌써부터 벼가 누렇게 익을 무렵에 장이 꽉 찬다는 참게장 담글 궁리를 하고 있었다. 게장용 진간장까지 따로 담가놓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생전에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시집의 식도락에 절망감을 느꼈다. 먹는 것 외의 딴생각을 하고 살 순 없는 것일까. 나는 딴생각을 하기 좋아하는 집안에서 자랐다. 어떤 것이 더 옳은지 비교할 생각은 없었지만 딴생각을 하는 게 나에게 더 맞는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어서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었다. 민어를 아무리 잘 요리해도, 양곱창을 아무리 잘 손질해도, 그 맛의 극치나 진수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민어는 민어맛을 벗어날 수 없고, 소 내장은 결코 은근한 소똥 냄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기가 굴비됐다고 해서 조기맛과 딴맛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민어맛이나 준치맛의 궁극까지 도달했다고 해서 어쨌다는 것일까. 누가 상을 줄 것도 아니고 인간이 신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고작 혀끝에서 목구멍까지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딴생각을 할 수 있다면 딴 세상이 열릴 것 같았다.
이런 것이 문화의 차이라는 거구나. 나는 내가 시집와서 느낀 어떤 이질감하고도 비교가 안 되게 혐오스러운, 그러나 개선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길이 미리 원천봉쇄돼버린 것 같은 시집의 이상한 풍습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중략)
문화의 차이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가 아니라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내 것보다 저급한 것으로 얕보고 동화는 물론 이해까지도 거부하는 태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그래, 문화 차이였구나! 시부모님이 나빠서도 아니고 내가 별나서도 아니고 두 집안의 문화가 달라서 내가 괴로웠던 거네!'라고 깨닫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한편으로 예전에 나는 나의 심적 불편함이 '내가 젊어서, 내가 깨어 있어서' 겪는 것이었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다. 옛 세대들은 결혼하고 응당 그러려니 하고 살았겠지, 라고 편히 생각했다. 그러나 50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역사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역사는 영 젬병이고 그 필요성에 대해서도 머리로는 알겠지만 깊이 체감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알겠다. 아무리 오래전 이야기라 하더라도 시대적 배경만 다를 뿐,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는 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문학에 공감하고 문학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는 거겠지.


여기서는 시댁 관련 이야기만 적었지만, <그 남자네 집>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한가득이다. 첫사랑의 설렘, 결혼할 남자가 부자인 줄 알고 한껏 들떴다가 결혼하고 느끼는 경제 관리의 중요성, 첫사랑과의 재회를 앞두고 느끼는 설렘과 내적 갈등, 아이 출산과 육아 이야기 등 인간 사는 이야기가 세세하고 흥미롭게 묘사되었다. 짧은 분량은 아니지만, 얘기처럼 공감하며 읽다 보니 나중엔 끝나는 게 아쉬웠다.


기상천외하고 쇼킹한 이야기보다 소소한 우리네 사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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