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생체인증
“스투포어! 스투포어!”
존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피터가 경찰봉을 휘두르며 마법 연습에 한창이었다. 그는 이미 땀범벅이었다.
“피터, 좋은 아침이야.”
“어, 존! 일어났어?”
“아침부터 열심히네.”
“그럼, 네가 어젯밤에 내일을 열심히 살라고 했잖아. 어제의 내일은 오늘! 그러니까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지. 맞지?”
“응. 그렇지.“
존은 어젯밤 일들을 떠올랐다. 다음날이 되었지만 피터는 어제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존은 어젯밤 펍의 사람들 역시 열심히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곧 마음 한구석에 자신이 실수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존은 배가 고파졌다. 어젯밤 호텔 스위트 룸에 남기고 온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가 떠오르며 다시 휘파람의 유혹이 밀려왔다. 하지만 또 후회할 것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그는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졌다. 존은 이 모든 일의 발단인 부랑자 노인을 찾기로 했다.
‘경찰서에 가면 그 노인을 만날 수 있겠지. 가장 쉬운 방법은 잘못을 저질러 구치소에 갇히는 건데, 그러면 나도 철창신세라 노인을 만날 수 없을 거야.’
한참을 고민하던 존은 옛날 어느 영화처럼 청소부로 위장하면 눈에 띄지 않고 경찰서에 잠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청소부 옷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몰랐다.
‘제임스가 알고 있지 않을까? 제임스에게 또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겠군.’
피터가 떠나려는 존을 불러 세웠다.
“존! 어디가?”
“아, 제임스 좀 만나려고.”
“제임스? 왜? 무슨 일인데?”
“경찰서에 좀 가려고 하는데, 필요한 게 있어서 말이야.”
“경찰서라고?”
“응.”
“설마, 그새 특식이 그리워진 거야?”
“그건 아냐.”
“그럼 뭔데?”
“거기서 만나볼 사람이 있어서. 이 올빼미 장난감을 준 사람이 거기 있거든.”
“그렇군. 근데 존, 경찰들이 아직도 마법을 쓸 수 있을까?”
“무슨 뜻이야?”
“옛날 경찰들이 이 마법봉으로 마법을 썼다고 했잖아. 지금은 사라진 고대의 마법을. 그냥 궁금해서. 내가 연습하는 고대의 경찰 마법과 현재의 경찰, 누가 더 센지 말이야.”
“글쎄.”
피터는 초심자 특유의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연습했던 마법을 쓰고 싶어 안달이었다.
“역시 부딪쳐봐야 알겠지?”
“음... 피터, 그건 좋지 않은 생각 같은데.”
“존, 난 완전히 준비됐어. 자신 있다고.”
“피터 그들은 전문가라고. 게다가 머릿수도 훨씬 많아.”
“존! 난 경찰들을 쓰러트리고 특식을 먹고 싶다고!!”
피터는 특식 또한 먹고 싶었던 것이었다. 존은 피터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일단 함께 제임스에게 가기로 했다.
“좋아, 피터. 하지만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경찰서에 들어가서 내가 그 노인을 만나기 전까지 마법 사용은 참아줘. 오케이?”
“오케이.”
존과 피터는 시티홀 역에 있는 제임스를 찾았다.
“제임스!”
“존, 피터! 내 친구들. 오늘은 무슨 일이야?”
“제임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제임스에게 물어봐. 위대한 제임스는 뭐든지 다 알지. 게다가 오늘은 누구에게나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어. 오늘은 열심히 살아야 하는 날이거든.”
존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제임스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존, 피터. 이건 아주 위험한 일이야. 알고 있지?”
존과 피터가 끄덕이자 제임스가 말을 이었다.
“우선 우리는 스마트폰과 옷이 필요해. 옷은 세탁소에 가면 되는데, 거기는 스마트폰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지, 경찰서도 마찬가지고. 근데 우리 같은 비등록 인원은 스마트폰을 구할 수가 없지. ‘생체인증’이 필요하거든.”
제임스는 생체인증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게 뭔데?”
“말 그대로 생체인증이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생! 체! 인! 증! 몰라?”
피터의 계속되는 질문에 제임스가 짜증 섞인 말투로 답했지만 사실 그도 생체인식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진정해 친구들. 어쨌든 우리는 생체인증을 통해서 스마트폰을 얻어야 한다는 거지?”
“그렇지! 역시 존은 늙어서 그런지 빨리 알아먹는군.”
“그럼 어디서 생체인증을 할 수 있는데?”
“중앙구역 스마트폰 자동발급기에서 가능하지.”
“음, 어딘지 잘 모르겠는데. 제임스, 같이 가줄 수 있어? 너의 지혜가 필요해.”
“물론이지 친구. 제임스는 언제나 친구들에게 지혜를 빌려준다고!”
존과 피터, 제임스는 중앙구역으로 향했다. 비규정복의 부랑자 3명이 몰려다니는 모습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사람들은 그저 그들과의 접촉을 꺼릴 뿐, 딱히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마트폰 자동발급기 앞에는 먼저 온 젊은 청년이 기계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흰 셔츠와 검정 바지 차림의 잘생긴 그는 어딘가 모르게 고위직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가 실랑이하던 자동발급기에서는 안내 음성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부서지신 분은 1번을, 스마트폰을 잃어버리신 분은 1번을 누르십시오.”
“이봐! 기계 아가씨! 내 얘기를 들어봐!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스마트폰을 떨어뜨려서 조금 부서졌지 뭐야! 그런데 내가 자전거를 세우고 스마트폰을 집어 든 순간, 지나가던 자전거가 내 손을 친 거야! 그래서 또 떨어뜨렸는데, 아까보다 더 부서진 거지. 그다음에 다시 집어 들었는데 그 순간 뒤에서 어떤 놈이 내 자전거를 들이받았어! 그 바람에 스마트폰이 하수구로 떨어져서 잃어버렸지! 그러면 내 스마트폰은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그다음에는 잃어버렸는데, 그럼 몇 번을 눌러야 하냐고!”
청년은 계속 화를 냈지만 자동발급기는 “스마트폰이 부서지신 분은 1번을, 스마트폰을 잃어버리신 분은 1번을 누르십시오.”를 반복할 뿐이었다.
“1번을 세 번 눌러보면 어떨까요?”
존이 조용히 뒤에서 말했다.
“그게 될 것 같아? 어디서 굴러먹다 온 부랑자 영감이 뭘 안다고 그래? 이렇게 내가 1번을 3번 누르면 될 것 같냐고?”
고위직 남자는 부랑자인 존에게 화를 내며 1번 버튼을 3번 눌렀다. 그러자 다음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귀하의 이름이 나오면 아래의 버튼에서 누르십시오. 귀하의 이름이 제임스면 1번을, 귀하의 이름이 존이면 2번을, 귀하의 이름이 피터면 3번을, 귀하의 이름이 한나면 4번을, 귀하의 이름이 레이첼이면 5번을, 귀하의 이름이 새라면 6번을 누르십시오”
남자는 화들짝 놀라서 존을 돌아봤다. 존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남자는 거드름을 피우며 마치 원래 자신이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나도 원래 1번을 세 번 누르려고 했어. 당연한 거 아냐? 부서지고, 부서지고, 잃어버렸으니까.”라며 1번을 세 번 눌렀다.
그러자 “안녕하세요, 제임스. 스마트폰이 발급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스마트폰 하나가 배출구로 떨어졌다.
“어? 내 이름은 피터인데? 제임스가 아니라고!”
“감사합니다, 제임스.”
“아니, 내 이름은 제임스가 아니고 피터라니까!”
그는 기계와 또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한참을 한심한 듯 그를 보고 있던 골동품 제임스가 참다못해 나섰다.
“헤이, 잘생긴 친구. 진정하라고!”
고위직 남자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제임스를 쳐다봤다. 제임스는 친근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이었다.
“친구, 친구는 지금 이 기계의 ‘생체인증’을 통해서 스마트폰을 발급받았지?”
“응. 그렇지.”
“바로 ‘생체인증’을 통해서 발급받았단 말이야. 생체인증, 알지? 과학의 결정체지. 근데, 생체인증에서 뭐랬어? 네가 제임스라는 거야! 넌 여태껏 몰랐겠지만, 네 진짜 이름은 제임스였던 거지!”
제임스의 말에 고위직 남자는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뭐라고? 말도 안 돼.”
“설마, 과학을 믿지 못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말문이 막힌 남자를 향해 골동품 제임스가 말했다.
“축하해 제임스, 드디어 네 진짜 이름을 찾게 됐구나!”
“맙소사, 내가 제임스라니. 어쩐지 제임스라는 이름이 친숙했었어. 게다가 내 친구들 중에도 제임스라는 이름이 많아!”
“그치? 내 이름도 제임스야! 너도 제임스였던 거고.”
“맙소사, 25년간 피터로 살아왔었는데, 이제야 그걸 알게 되다니!”
“그래. 어쩌면 누군가가 너를 속이고 여태 너의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네 진짜 이름을 찾게 돼서 정말 다행이야. 이제 얼른 가서 네 진짜 삶을 되찾도록 해.”
고위직 청년은 뭔가 크게 깨달았다는 얼굴로 존의 일행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자, 그럼 우리 스마트폰을 발급받아 볼까?”
제임스가 만족한 얼굴로 자동발급기 앞에 섰다.
“근데 제임스, 우리는 스마트폰이 부서지지도 않았고 잃어버리지도 않았는데 어쩌지?” 피터가 물었다.
“피터, 일단 잘 모를 때는 1번부터 누르면 되는 거야! 오케이?”
“역시 제임스는 모르는 게 없어.”
제임스가 1번을 누르자 다음 단계로 진행되었다. 일행은 각자 자신의 이름의 스마트폰을 하나씩 발급받았다.
“자, 됐지?”
제임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존과 피터를 향해 멋진 척 눈짓했다. 그때 세 명의 스마트폰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제임스, 이게 뭐야? 무슨 메시지가 왔어!”
피터의 스마트폰에는 장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의 할 일]
당신은 오늘 도시의 전력을 담당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도시의 전력이 마비될 수도 있습니다.
(1) 09시까지 4-5번 유틸리티 시설로 가시오.
(2) 30층으로 가시오.
(3) 01번 자리에 앉으시오.
(4) 자리 앞에 있는 빨간색 등에 불이 들어오면 자리에 있는 빨간색 레버를 위로 끝까지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시오.
(5) 09시부터 12시까지 계속하시오.
(6) 12시에 1층에 있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시오.
(7) 13시까지 30층으로 가시오.
(8) 01번 자리에 앉으시오.
(9) 자리 앞에 있는 빨간색 등에 불이 들어오면 자리에 있는 빨간색 레버를 위로 끝까지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시오.
(10) 13시부터 17시까지 계속하시오.
(11) 17시에 집으로 가서 자유 시간을 가지시오.
제임스와 존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제임스는 가스공급관을 담당하는 4-7번 유틸리티 시설로, 존은 상수도를 담당하는 4-1번 유틸리티 시설로 가라는 메시지였다. 문자 메시지를 열 번 반복해서 읽고 겨우 의미를 이해한 피터가 물었다.
“지금 몇 시지?”
“11시 30분인데?”
“큰일이야! 내가 자리에 없는 바람에 도시의 전력이 마비되게 생겼어!!”
“가스도 마찬가지야!”
“어? 그럼 상수도도 문제가 있겠는 걸!”
세 사람은 각자가 맡은 일에 공백이 생겨 도시가 마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패닉에 빠졌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맡은 유틸리티 시설로 뛰자!”
“젠장, 내가 일을 해야 하다니. 일하지 않으려고 부랑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피터가 뛰면서 투덜거렸다. 존과 제임스 역시 그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중압감이 갑자기 그들을 짓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