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보들의 도시
백색 도시 서쪽 변두리.
버려진 광장 분수에 때늦은 아침햇살이 들었다. 밤새 내린 빗물 고인 분수에 햇살이 닿자, 광장은 환한 황금빛으로 일렁이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텅 빈 광장의 짧은 황금기는 새소리 하나 없는 적막과 함께 조용히 빛을 잃어갔다.
광장과 함께 버려진 지하철역 입구는 세월과 함께한 크랙이 얼기설기 퍼져 있었다. 그 틈을 작은 풀들과 이끼들이 메우고 있었다. 백색 도시의 유일한 초록색이었다.
옛 도시의 흔적은 버려졌지만 깨끗했다. 비단 이곳뿐 아니었다. 백색 도시는 고층빌딩이 밀집된 중앙에서부터 도시 외곽까지 모든 곳이 깨끗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태양이 대지를 충분히 데우자 어두컴컴한 지하철역 입구로 작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속삭임은 곧 시끌벅적한 말소리로 바뀌어 입구를 울려댔다. 곧이어 회색 부랑자 무리가 시궁쥐처럼 느릿느릿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며칠간 퍼부은 비 끝에 나온 햇빛을 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여몄던 옷을 풀어헤치고 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 일광욕을 즐겼다. 마지막 부랑자가 올라오고 한참 뒤 말끔한 차림의 부랑자 하나가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왔다. 덥수룩한 수염, 다 해진 점퍼와 낡은 운동화 대신 그는 단정하게 뒤로 넘긴 반백의 머리카락,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 비록 낡긴 했지만 갈색 재킷에 검정 구두 차림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 입구를 나온 노신사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널브러진 휴지처럼 일광욕을 즐기는 부랑자들 사이를 지나 광장 중앙 분수로 향했다. 분수대에 이른 그는 깨끗한 빗물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분수대 곁에 재킷과 셔츠를 벗어 가지런히 개켜 놓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옷을 입고 있는 그를 향해 부랑자 한 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제임스! 너 설마 씻은 거야? 맙소사,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어차피 내일이면 더러워질 텐데!"
“클레오는 말했어. 신사는 항상 청결하고 단정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녀는 항상 내게 멋진 신사라고 했지. 그리고 클레오는 언제나 옳았지. 그리고 나는 제임스가 아니라 존이야.”
그는 존이었다. 대재앙에 모든 걸 잃고 집을 떠났던 바보 존은 어느새 50대 후반의 노신사가 되어 있었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네. 한 번에 하나씩만 얘기해!”
“아냐, 됐어. 신경 쓰지 마.”
“뭐?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부랑자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발끈했다.
“그런 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무시한 거 맞잖아!”
“미안해, 친구. 괜찮다면 내가 다시 차례대로 얘기해 줄까?”
“아냐, 됐어. 네가 사과했으니 내가 옳다는 거잖아!! 더 이상 골치 아픈 얘기는 치우자고.”
“그럼 우린 괜찮은 거지?”
“물론이지.”
부랑자가 돌아가고 존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햇볕을 느꼈다. 따스한 기운이 얼굴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어디에나 타인의 평화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이 있듯 어김없이 부랑자 둘이 굳이 존의 곁으로 와 떠들기 시작했다.
“그 얘기 알아? 돌고래의 IQ가 90 이래.”
“바보 같은 소리 마! 인간 평균 IQ가 80이라고! 물고기가 인간보다 똑똑하다고?”
“뭐? 바보? 나 바보 아니야!”
“누가 너보고 바보래?”
“나 바보 아니라고! 그리고 돌고래는 물고기가 아냐, 이 바보야!”
“뭐? 지금 나보고 바보라고 했냐? 이 바보 자식이!”
두 부랑자의 대화는 금세 주먹 다툼으로 번졌다. 싸움소리에 다른 부랑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환호하며 응원했다. 엉망이 된 둘의 얼굴을 두고 볼 수만 없었던 존이 결국 나서서 그들을 말렸다. 그때 전기차 한 대가 “왜애앵” 사이렌을 울리며 광장 동쪽으로부터 미끄러지듯이 다가왔다. 경찰 밴이었다. 부랑자들은 어두운 방에 켜진 불빛에 도망치는 바퀴벌레들처럼 지하철역 안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주먹 다툼을 하던 부랑자 둘은 말리던 존을 희생양 삼아 넘어뜨리고는 지하철역 안으로 헐레벌떡 도망쳤다.
“꼼짝 마! 두 손 머리 위로 올려!”
넘어진 통에 미처 도망치지 못한 존이 양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
“존! 또 너야?”
“안녕하세요. 경찰관님들.”
“이런 바보 자식. 또 구치소 밥을 먹고 싶은 거야?”
“허허허. 그것도 나쁘지 않죠.”
“참내, 넉살은. 저기 밴 뒤에 올라타.”
“알겠습니다. 경찰관님.”
존은 웃으며 경찰 밴에 올랐다. 존은 종종 자진해서 구치소에 들어갔다. 비록 바보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그곳은 언제나 특식과 편안한 잠자리, 그리고 따뜻한 샤워를 제공했다. 구타나 억압 같은 건 없었다. 구치소에 이틀 정도 머물고 나면 경찰들은 ‘바보 녀석, 이제 충분히 반성했지?’라며 풀어주는 것이 통상적인 절차였다. 그리고 존은 그 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바보’라는 그 치욕스러운 말 듣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기에 구치소에 절대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존을 태운 경찰밴이 갑자기 멈춰 섰다. 잠시 후 경찰들의 무전통신 소리가 들렸다.
“네, 그런데 그게 수배서와 얼굴은 일치하는데, 다른 옷을 입고 있는데요?”
“다른 옷? 야, 인마! 그럼 당연히 다른 사람이잖아! 아, 잠깐! 수배화면 밑에 뭔가 써졌는데? ‘옷, 머리스타일, 수염이 다르더라도 같은 사람임.’ 그렇군! 이봐, 같은 사람이래! 데려와!”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경찰밴 문이 열렸다. 곧 70대로 보이는 왜소한 남자가 피폐한 모습으로 차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고 한참이 지났지만 존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도시에서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보는 건 십수 년 만이었다. 회색의 긴 수염과 긴 머리의 노인은 안경 탓인지 지식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경찰에 붙잡힌 충격 탓인지 그는 자리에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존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
노인은 무표정한 눈으로 존을 한 번 보고는 다시 허공을 바라봤다.
“허허허. 선생님(Sir),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루 이틀 정도만 지나면 풀어줄 거예요. 게다가 거기는 밥도 맛있고 잠자리도 꽤 괜찮아요. 사실 저는 특식이나 샤워를 위해 이따금씩 일부러 잡혀 들어가기도 한다니까요. 허허허.”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말없이 존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선생님... 이라고요?”
“네, 선생님!”
“선생님이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네요.”
“허허허 그런가요?”
존은 노인의 반응이 낯설었다. 대게는 ‘내 이름은 선생님이 아니야!’라고 답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존 역시 그런 그에게 약간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의 이름을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존’, ‘피터’, ‘제임스’ 셋 중 하나일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3차 대재앙’ 이후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다 그랬다. 남자는 모두 ‘존’, ‘피터’, ‘제임스’ 중 하나였고, 여자는 ‘새라’, ‘레이첼’, ‘한나’ 중 하나였다. 성(姓)은 없어졌고 이름만 존재했다. 어차피 대재앙 이후의 생존자들은 현격한 지능저하를 앓았기에 그 이상의 이름은 기억하기도 어려웠다. ‘바보’들만 남은 세상이었다.
“네. 참으로 오랜만이에요! 그나저나 일부러 들어간다고요? 구치소에?”
노인은 이제 약간의 의심과 호기심에 찬 눈으로 존을 바라봤다.
“네. 그럼요.”
“폭력이나 학대는 없나요?”
“허허허 그런 건 없어요, 선생님. 다만 경찰관들이 바보라고 하긴 하는데, 아시잖아요, 사람들은 바보라는 말 듣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걸요. 뭐, 저는 어려서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괜찮지만요. 하지만 클레오는 제가 불편함에 조금 둔한 착한 사람이지 바보는 아니라고 했어요. 진정한 바보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클레오는 항상 옳았죠.”
“클레오... 라고요?”
“클레오는 제 아내였어요. 예전에 죽었지만.”
“아... 그랬군요. 유감입니다.”
“괜찮습니다. 어쨌든 구치소는 바보 소리만 견딜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곳이에요.”
“...그렇군요.”
대화를 마친 노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는 급기야 안경을 벗고 두 손가락으로 미간을 잡은 채 뭔가 중얼거렸다. 그런 노인이 걱정됐는지 존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으시군요? 제 친구가 그랬어요. 기분이 안 좋을 때 이렇게 하면 한결 나아진다고 했어요. 휘~휘~휘~”
존은 노인을 위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노인은 마치 미지의 생명체를 발견한 양 깜짝 놀라며 존을 바라봤다.
“어떠세요? 기분이 좀 좋아지셨나요?”
“맙소사, 당신 좀 전에 뭘 한 거요?”
“허허허. 이건 휘파람이라는 거예요. 신기하죠? 저도 배우는 데 오래 걸렸어요.”
“배웠다고요?”
“네.”
“누구한테요?”
“제 친구 키드슨 할아버지한테서요.”
“...키드슨?!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죠? 어디에 가면 그분을 만날 수 있죠?”
“글쎄요, 할아버지는 어느 날 사라졌어요. 말도 없이.”
“언제요? 그게 언젠데요?”
“제가 어렸을 때니까, 한 40년은 됐을 거예요.”
“아, 대재앙 전 사람이었군요.”
“네, 오래된 일이죠. 그러고 보니 선생님, 어딘가 키드슨 할아버지를 조금 닮으신 것 같은데... 설마... 하하 아닙니다. 그럴 리 없죠.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벌써 100살도 넘으셨을 테니까요.”
“...저는 그가 아닙니다. 그나저나 40년 전이면 꽤 오래전 일인데 그걸 기억하시는군요.”
“허허허, 그러게요.”
대화를 이어가면서 노인은 점점 생기를 되찾아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쯤 영혼이 나가 있었던 그는 이제 허리를 세워 존 쪽으로 향해 있었다.
“당신 이름이?”
“존이요.”
“존, 아... 그렇죠... 역시 존이었군요.”
노인은 뭔가 특별한 이름을 기대했는지 존이라는 이름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흥분상태로 돌아왔다.
“그래, 존은 그저 이름일 뿐이지... 존! 어쩌면 당신이 바로 제가 그토록 찾던 ‘그’ 사람일지도 몰라요!”
“제가요?”
“당신은 배우고, 기억하고, 심지어 배운 것을 응용할 수도 있어요!”
“음... 그런가요?”
“분명해요! 당신이 적격자예요!”
노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운전석의 경찰관이 조용히 하라며 칸막이를 쾅쾅 두드렸다. 노인은 흥분을 간신히 누른 후 주변을 한번 살피더니 코트 주머니에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플라스틱 올빼미 모형 장난감을 조심히 꺼내 존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허허, 이것 참 귀엽게 생겼네요.”
존은 모형을 받아 들고는 이리저리 돌려봤다. 두 개의 큰 눈이 강조된 갈색 올빼미 장난감은 오래된 탓인지 여기저기 칠이 벗겨져 있었다. 노인은 존에게 장난감을 빨리 주머니에 감추라고 했다.
“존, 잘 들어요. 그건 정말 정말 중요한 겁니다. 아무에게나 보여주면 안 됩니다. 특히, 경찰은 절대! 안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약속해 주세요, 그걸 꼭 지키겠다고요. 그리고 언젠가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을 만나면 꼭 전해주세요. 이건 꼭 다음 그리고 또 다음 세대로 전해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언젠간...”
노인이 진지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존에게 말했다.
“이 장난감을요? 그러죠, 뭐.”
“제 말을 이해하신 건가요?”
“네, 제가 잘 갖고 있다가 똑똑한 사람에게 전해달라고요.”
“맙소사. 놀랍네요. 단 한 번 만에 이해하다니.”
“근데 그 사람이 누구죠?”
“글쎄요. 제가 이걸 가져야 할 사람이 당신이라고 느꼈듯이, 분명 당신도 그렇게 느낄 사람이 있을 겁니다.”
“허허허. 뭐 알겠습니다.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래되긴 했어도 쉽게 망가지지는 않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그 휘파람을 조금 더 불어주시겠습니까? 정말 오랜만에 듣는 소리군요.”
“물론이죠.”
존은 휘파람을 불었다. 어릴 적 동요가 뒤섞인 곡을 기분 내키는 대로 불어댔다. 엉망진창 멜로디였지만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쾅쾅! 이 바보들! 무슨 소리야?”
앞 좌석의 경찰관이 다시 칸막이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존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휘파람 소리를 들어서인지, 아니면 뭔가 오래 묵은 짐을 내려놓았다는 안도 때문인지 노인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휘파람이 저 선생님 기분을 좋아지게 했나 보군. 역시 키드슨 할아버지는 최고라니까.’
존은 옛 친구였던 키드슨 할아버지를 꼭 닮은 노인을 기쁘게 해 드렸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