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 머리에 헬멧이 끼어 빠지지 않는다면

붙잡아야 할 기준 먼저 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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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센터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첫째 은이가 학원 간 사이 진이에게 같이 나가자고 했다. 귀찮다며 소파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 다이소에 들리자고 했다. 그제야 씩 웃으며 옷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마치고 마트에서 알배추와 두부를 산 뒤, 바로 옆 다이소로 갔다. 장난감 코너를 둘러보던 아이는 5천 원짜리 조립 블록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자기 용돈으로 사겠다며 계산대에 턱 올렸다.


집에 돌아와 진이는 한 시간 가까이 집중해 블록을 만들었다. 잠시 후 은이가 돌아왔다. 셋이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둘은 집에 있던 레고 상자를 꺼내왔다. 방금 만든 블록 로봇도 합류해 역할놀이가 시작됐다. 나는 바로 옆 식탁 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으앙.


갑자기 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누나는 당황하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덩달아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진이는 작은 블록 하나를 손에 쥐고 나에게 다가왔다. 레고 머리에 씌운 헬멧이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헬멧은 다이소에서 산 블록에 들어 있던 것이고, 안에 끼운 머리는 레고였다. 사이즈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걸 몰랐던 첫째가 헬멧을 쑥 끼워버렸나 보다. 방금 자기 돈으로 산 블록을 누나가 못 쓰게 만든 셈이니, 아이 입장에서는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은이는 나름대로 해결해 보려고 레고 칼도 써 보고 연필도 넣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틈이라도 있으면 뭘 걸어 빼볼 텐데, 공간이라고는 목이 연결되는 일직선 구멍뿐이었다. 그 사이 나는 레고 통을 엎어 다른 헬멧이 있는지 찾아봤다. 진이는 잠시 조용해졌다가 다시 서럽게 울기를 반복했다. 그 많은 레고 속에 안타깝게도 헬멧은 없었다.


이런 일이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누군가는 이미 겪었고, 답도 있지 않을까. 네이버에 ‘레고 헬멧 빼는 법’을 검색했다.


유레카!!


답이 있었다. 휴지 한 장을 레고 몸통 목에 얹고 머리를 빡빡하게 끼워 고정한 뒤 헬멧을 빼는 방법이었다. 역시!


크리넥스 상자에서 휴지 한 장을 뽑았다. 목에 휴지를 얹고 머리를 끼웠다. 몸통을 꽉 붙잡았다. 헬멧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얼굴이 사라졌다. 헬멧이 돌아간 것이다. 성공이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블록을 식탁에 탁 내려놓고 물개박수를 쳤다. 그 모습을 본 은이도 “와!” 하며 박수를 따라 쳤다. 진이는 블록을 손에 들었다. 꾹 닫은 입술이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은이가 헬멧을 빼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단단히 끼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실이 엉켰을 때 끝을 잘못 잡아당길수록 매듭은 더 조여졌는데. 돌아보면 그건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움직이지 말아야 할 부분을 잡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헬멧 빼는 방법도 마찬가지였다. 더 세게 힘주는 일이 아니라 힘을 써야 할 자리를 정확히 찾는 일이 필요했다.


마음의 문제도 다르지 않았다. 관계가 틀어졌을 때 나는 상대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를 붙잡고 계속 곱씹었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순간의 행동만 문제 삼았다. 선택 앞에서는 아직 오지 않은 결과를 앞당겨 걱정했다. 불안할수록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렸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그때마다 도움이 되었던 건 상황을 더 분석하는 일이 아니었다. 휴지가 목을 단단히 고정해 주었던 것처럼 내가 잡아야 할 기준 하나를 먼저 세우는 일이 필요했다.


돌이켜보면 일이 풀리기 시작한 순간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우선순위를 하나로 좁히고 붙들 수 있는 지점을 정한 뒤에야 상황은 조금씩 움직였다. 갑자기 내가 대단해져서가 아니라 힘을 써야 할 방향이 맞았기 때문이다.




헬멧이 빠지면서 아이들 마음에 끼어 있던 감정도 함께 빠져나간 것 같았다. 다시 웃고, 다시 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어지는 오후가 유난히 소중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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