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버티게 하는 힘
아이에게 처음 폰을 사주면서 액정 보호 필름을 붙였다. 기포 하나 없이 붙이겠다고 몸을 잔뜩 웅크려 집중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오른쪽 윗부분이 살짝 들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이는 필름을 벗겨냈다. 거슬리고 불편했나 보다. 나도 필름 없이 사용하는 편이라 그러라고 했다.
어느 날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떨어뜨렸는데 폰이 거미줄처럼 되어버렸어.”
거의 울다시피 말해서 한참 만에 알아들었다. 액정이 깨졌다는 뜻이었다. 집에 돌아와 폰을 보니 정말 거미줄처럼 기스가 쫙 나 있었다. 아이는 필름을 괜히 떼었다며 후회했다. 다음에 새로 사면 꼭 붙이겠다고 다짐했다.
누가 사준 대냐고 타박해 놓고는 결국 다시 하나를 구입했다. 다행히 2년 정도 사용한 상태라 비용은 많이 들지 않았다. 새 폰 상자 안에 액정 보호 필름이 들어 있었다. ‘부착 실패할까 봐 2장 넣어드렸어요!’라는 센스 있는 메모와 함께. 예전에 비해 훨씬 좋아져 있었다. 얇은 플라스틱처럼 단단해서 붙이기 쉬웠다. 이번에는 한 번에 성공했다.
아이에게 폰을 건네며 보호필 름도 붙여 두었다고 말했다. 필름을 붙여도 떨어뜨리면 깨질 수 있다고, 가장 중요한 건 조심하는 거라고 단단히 일렀다.
아이가 물었다.
“근데 필름 붙여도 깨질 수 있으면 필름은 도대체 왜 붙이는 거야?”
떨어뜨리면 어쩔 수 없지만 쓰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작은 기스를 막아주는 보호막 같은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아, 희생목 같은 거네.”
희생목이 뭐냐고 묻자 아이는 역사 수업에서 배웠다며 설명해 주었다.
"옛날에 나무 기둥을 썼는데 비가 오면 나무가 썩잖아. 그래서 옆에 대신 비 맞고 썩게 하는 나무를 세웠는데 그게 희생목이야."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이건 글감이다. 곧바로 메모 앱을 켰다. 희생이라면 바로 이 엄마 아니겠어, 하면서.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어쩌면 아이들도 나의 희생목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공부로 바쁠 때 아이들에게 시간을 많이 내주지 못했다. 둘이 함께 있을 때는 잘 놀지만, 아이가 혼자 있는 시간에는 조용히 장난감을 만지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남편이 대신 픽업 하는 날도 잦았고, 시험을 앞둔 주말에는 몇 시간씩 스터디 카페에 다녀오기도 했다.
주변 아이들 하루도 만만치 않다. 은이 친구 중에는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 7시 반에 학원 차에서 내려 집에 가는 아이가 있다. 진이 친구는 오후 5시 축구 수업이 있는 날, 아침부터 축구복을 입고 학교에 간다. 아이들 역시 부모의 선택과 일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희생목이 되기도 한다.
기둥이 있으니 희생목이 있고, 희생목이 있으니 기둥은 버틸 수 있다. 결국 둘 다 필요한 존재이다. 누가 더 중요하다고 구분할 수 없다. 아이가 말한 ‘희생목’은 단순히 대신 썩는 존재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무게를 대신 짊어지는 존재였다.
가끔은 나 자신이 나의 희생목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당장의 편안함을 미루고, 오늘의 불편을 감수하는 선택들.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힘은 결국 어제의 내가 대신 맞아준 비 덕분이다.
희생목은 기둥이 오래 서 있도록 돕기 위해 자기 몫의 시간을 먼저 견디는 존재다. 어제의 나에게 미안함보다 고마움을 느낀다. 조용히 그 자리를 지켜준 덕분에 오늘의 내가 여전히 서 있다.
내일의 나는 또 다른 비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내일의 은이는 폰 떨어뜨리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