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늦게 잠들었던 탓인지 아이가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책도 패드도 침대로 가지고 들어가더니 결국 잠들어 버렸다. 간신히 깨워 태권도와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내내 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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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안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방학 계획은 아이 스스로 세웠다. 나는 옆에서 말리느라 바빴다.
"이걸 하루에 다 하겠다고? 너무 많은데."
아이는 단호박이었다. 자신 있다고 해서 겨우 한자 공부만 월수금으로 줄여놓았다. 쉽게 체크할 수 있는 항목 두 개를 더 얹어 주었다. 아이가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굳이 말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체크리스트 2일째.
아이는 혼란스러워했다. 아직도 못한 게 많다며 울먹거렸다.
"내가 나를 왜 이렇게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어.ㅠㅠ"
해야 할 일에 어깨가 잔뜩 눌려 있던 아이는 저녁부터 울기 시작했다. 몇 개는 안 해도 괜찮다 해도 내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못 했다는 사실에만 꽂혀있는 듯했다.
남편은 자신을 '이상적현실주의'라 부른다. 내가 보기엔 "이상적"현실주의이다.목표가 뚜렷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건 좋지만, 내 눈에는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반면 나는 지극히 현실주의 자이다. 내가 해낼 수 있는 만큼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
나는 새벽에 알람이 울리면 단번에 일어나는 편이다. 전날 내가 일어날 수 있을 거라 확신한 시간에 알람을 맞춰놓기 때문이다. 남편 알람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끈다. 그럴 바엔 차라리 푹 자고 적당한 시간에 맞추지 싶을 때가 많다.
공부할 때 나는 현실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웠다. 남편은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만들어 내겠다며 스케줄을 짰다. 새벽 일찍 일어나기 위해 저녁도 먹지 않고 8시에 잘 거라고 했다. 내가 보기엔 무척이나 이상적인 계획이었다. (그게 이유는 아니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남편은 응급실에 갔다. 이후 계획을 조금은 현실적으로 수정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남편과 나의 성향은 극명하게 다르지만, 다행히 서로를 보완하며 살아가고 있다. 남편의 이상주의는 활력소가, 나의 현실주의는 안전판이 되어준다.
딸의 모습에서 남편이 보였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 물론 의욕이 앞서는 게 나쁘진 않다. 그들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니까. 다만 나는 그저 옆에서 조용히 응원한다. 현실에 부딪혀 계획을 수정할 때는 잘했다고만 해줄 뿐이다.
울다 지쳐 잠든 아이가 새벽에 신음하며 깼다. 아이 옆에 누워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도 너랑 비슷해. 계획을 많이 세웠다가 힘들어할 때가 많아. 아빠는 그럴 때 계획을 다시 세우더라. 내일 엄마랑 체크리스트 다시 쓰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곤하게 잠들었다.
어른도 계획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배운다. 아이 역시 그런 과정을 겪는 중일 것이다. 중요한 건 계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이가 조금 더 단단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