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마음이 시작이 되어줄 때
첫째는 수영을 잘하진 않지만 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어릴 적엔 구명조끼나 킥판을 꼭 챙겨서 물에 들어갔는데 어느 순간부터 잠수를 하고 바닥에 손을 짚거나 앉는 모습까지 곧잘 보여주기 시작했다.
둘째 아이는 달랐다. 물이 얼굴에 튀는 것조차 싫어했다. 물놀이 가면 머리 위로 물이 떨어지는 공간은 피해 다녔다. 머리 감을 때면 물이 얼굴로 흘러내리는 것만으로도 기겁하며 수건에 연신 얼굴을 닦았다. 눈에 물만 들어가도 호들갑을 떨곤 했으니 수영은 아이에게 쉽지 않은 영역이었다.
아이가 다녔던 유치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영 수업이 있었다. 아이들이 많다 보니 실제 수영할 시간은 길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3년을 다닌 건데, 졸업할 무렵이 되어서야 물속에 머리를 넣었다가 빼는 걸 성공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사실 나도 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친구들은 발차기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열심히 팔을 젓고 다리를 굴려도 머리를 물 밖으로 빼보면 늘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수영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고 다시 배우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게다가 중학생 때는 물에 빠진 경험까지 더해졌다. 교회 수련회에서 계곡 물놀이를 하다 갑자기 깊어진 물에 빠졌고, 교사로 함께 갔던 아빠가 나를 구해줬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물속에서 숨 참는 일이 불안하고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그랬기에 수영을 억지로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수영은 즐기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되는 활동이라 생각했다. 물론 위급한 상황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수영을 못 하면 애초에 그런 상황 자체를 피하게 되겠지. 40년 살아보니 수영 못해도 아무 문제없었다. 그래서 둘째에게 수영을 권하거나 물에 적응시키려 애쓰지 않았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달라졌다.
작년 겨울, 둘째는 처음으로 턱까지 오는 깊이의 물에 맨몸으로 들어갔다. 발을 동동 구르며 웃음 반 긴장 반으로 물속을 오갔다.
여름방학을 맞아 시댁 식구들과 함께 워터파크에 갔는데 이번에는 한층 더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처음엔 구명조끼를 입고 팔다리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려 애썼다. 얼굴을 물에 넣고 여러 번 잠수도 했다. 이내 조끼를 벗고 본격적으로 수영을 시도했다. 물에 몸을 띄우고 발차기하며 팔을 세 번 젓고 고개를 들었다. 팔 젓는 걸 한 번씩만 늘려볼까 하는 격려에 아이는 의외로 쉽게 도전했다. 물속에 머무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나는 왜 앞으로 많이 안 가? 누나처럼 앞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
할아버지와 고모부의 수영 강습이 시작됐다. 숨 참는 법, 무릎 펴고 발차기하는 자세까지 하나하나 설명을 들으며 아이는 금세 몸으로 익혀나갔다. 마지막에 2미터 가까이 떨어진 거리를 단숨에 헤엄쳐 가는 아이를 보며 나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얼굴을 물에 집어넣었다 나온 걸로 박수받던 아이였으니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이를 보니 그 말이 꼭 맞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떡잎이 별로여도 어느 날 쑥 자란 잎이 햇빛을 만나 더 튼튼해질 수도 있다. 하고 싶은 마음과 조금의 용기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다는 걸 아이가 몸소 보여주었다.
작은 용기는 생각보다 큰 변화를 만들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서툴고 낯설다. 하지만 시작에 마음을 보태는 순간 아이든 어른이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였다.
나도 물안경 쓰고 물속에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됐다. 잠시였지만. 물 안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 걸음만 더 가보자는 마음을 나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