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이가 5만 원을 벌어왔다

조급한 비교 대신 믿음으로 기다리는 시간

by IMAGE


첫째 아이는 일곱 살 겨울부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110 사이즈 도복을 받아 바지를 한 단 접혀 입혔지만 그마저도 끌렸다. 그랬던 아이가 이젠 바짓단 아래로 복숭아뼈가 다 보일 만큼 훌쩍 자랐다. 언제까지 태권도를 배울 거냐 물었더니 4품까지 딸 거란다. 도복을 새로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도복 맞췄을 땐 4만 원을 냈다. 반팔인 하복은 그보다 더 비싼 4만 5천 원. (그 비싼 하복은 팔 동작할 때 펄럭이는 소리가 안 난다고 안 입는다.)


새 도복을 챙겨주셨다는 얘기에 도복 값을 내기 위해 학원에 연락했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사범님은 아이의 성실한 수련 태도와 예의 바른 모습에 대한 선물로 준다고 하셨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도복 값은 족히 5만 원은 됐을 테니 아이가 스스로 5만 원을 벌어온 셈이다.


원래 두 번째 도복은 그냥 주시는 걸지도 모른다. 잠깐 의심도 들었지만 아이가 열심히 한 건 사실이다. 어쨌든 감사했고, 아이가 기특했다.




가끔 친구들과 티타임을 갖는다. 대화 주제는 늘 아이들이다. 방학 특강으로 종일 영어 캠프에 보냈다는 이야기, 영어와 수학 학원을 병행하느라 수영은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선행 학습 이야기에 나는 별말 없이 조용히 웃기만 했다. 우리 아이는 태권도와 미술, 피아노, 그리고 주 1회 논술 수업이 전부다. 작년까지만 해도 집에서 공부하는 수학 진도가 꽤 빨랐지만, 지금은 학원 다니는 친구들을 따라잡기 어렵다.


우리 부부는 나름의 교육관을 갖고 있다. 놀면서 배우는 게 가장 좋다고 믿고, 아이가 즐겁게 배우는 걸 우선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대화를 듣고 돌아오면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문제집 푸는 걸 싫어하는 아이에게 괜히 친구들 이야기를 꺼내 들먹이게 된다. 아직은 노는 게 중요한 나이라고 하지만 나는 내심 걱정이다. 이러다 정말 노는 게 습관이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를 다시 들여다본다. 첫째 아이는 동기부여가 되면 누구보다 성실하게 해내는 아이다. 품띠를 빨리 따고 싶다며 태권도를 주 5일로 바꿨다. 일 년에 한두 번 있는 교회 특별새벽기도도 여행지에서도 온라인으로 꼭 참여한다. 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명씩 다독왕을 뽑는데, 다독왕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달은 한 달 내내 아침마다 학교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정말 해내는 아이임을 나는 알고 있다.




1학년이 되면서 아이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재미있어하던 것도 잠시, 조금씩 어려워지자 흥미를 잃었고 마침 마음이 복잡했던 시기와 겹쳐 결국 학원을 그만뒀다. 피아노만큼은 꼭 가르치고 싶었지만 욕심을 내려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정 배우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기로 마음도 먹었다.


“엄마, 나 피아노 다시 배우고 싶어.”

학원을 그만둔 지 딱 1년 만에 아이가 말했다. 처음엔 흘려들었지만 몇 번이고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며 아이의 진심을 느꼈다. 피아노 학원 다니면 방과후 수업도 빼야 해고 친구들이랑도 못 놀 거라는 말에도 괜찮단다.


“아이가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고 왔다 하더라고요.”


첫날 저녁에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성격이 밝고 말이 많아서 가르치기가 참 좋은 아이라며 칭찬을 건네셨다. (애가 말이 좀 많죠.. 하하하...) 아이가 열심히 할 거라고 다짐하고 왔다는 말을 하더라며 웃으셨다. 울상인 얼굴로 문 앞에서 들어가기 망설이던 아이, 피아노는 배우고 싶지 않다던 아이가 바뀌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조바심이 날 때가 있다. 옆집 아이는 벌써 체르니 몇 번을 하고, 수학은 몇 학년 진도까지 나갔고, 해리포터 원서도 술술 읽는다는 말이 들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다짐한다. 다른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의 시계를 보자고. 교문 앞에서 나눠주는 전단지에 흔들리지 말자고. 엄친아를 부러워하지 말자고.


지금처럼 아이가 자기 안에서 동기를 만들어내고 그걸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충분하다. 중요한 건 진도가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과 속도로 단단히 내딛는 걸음이니까. 나는 그 발걸음을 믿어주고 격려하며 기다려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우리 아이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는 아이다.


그리고 나는 “5학년부터 열심히 공부할 거야”라는 아이의 말도 믿는다.





keyword
이전 26화겁 많던 아이가 헤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