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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노트는 벽에도 있다

사소한 소망이 현실이 되는 가장 단순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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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이 텁텁해 뭔가 상큼한 게 먹고 싶었다. 마침 다이소에 들를 일이 있어 간식 코너를 지나는데 '왕꿈틀이'가 눈에 들어왔다. 마트에서 파는 젤리 중 나는 이게 제일 맛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집어 들었다.


집에 와서 일을 하며 하나씩 꺼내 먹었다. 마지막 한 개를 입에 넣는 순간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첫째 아이였다. 급히 빈 봉지를 재활용 바구니에 던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현관문으로 마중나갔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잠시 뒤 둘째 아이도 집에 돌아왔다. 첫째가 학원에 간 사이 나는 저녁 준비를 하고 둘째는 식탁에 앉아 종이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이는 만들던 게 마음에 안 든다며 종이를 구겨 재활용 바구니에 넣었다. 테이프가 붙어 있으면 분리수거가 안 되니 쓰레기통에 옮기라 하자 아이는 투덜거리며 바구니로 가서 종이를 꺼냈다.


"엄마! 이거 누나가 몰래 먹은 거야?"


아차 싶었다. 아까 던져둔 왕꿈틀이 봉지가 발각된 것이다. 평소엔 라면이나 간식 봉지를 잘 숨겨서 버렸는데 방심했다가 딱 걸렸다. "나도 왕꿈틀이 먹고 싶다~"를 무한 반복하는 아이와 그날 밤 결국 다이소에 다녀왔다.



며칠 전, 첫째가 저녁에 우동이 먹고 싶다 했다. 평소 저녁에 면 요리는 잘 해주지 않지만, 아이의 간절한 눈빛을 보니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학원에 다녀올 때쯤 우동을 끓였다. 현관문을 열며 아이는 "와! 우동 냄새다!" 하고 외치며 부엌으로 달려왔다.


"엄마! 내 마법 노트가 진짜야!"


요즘 학교에서 친구와 함께 '마법 노트'를 쓰는데 거기에 음식을 그리면 실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떡볶이를 그렸더니 급식에 떡이 들어간 반찬이 나왔고, 닭다리를 그렸더니 삼계탕이 나왔다고 했다. 닭다리 그리면서 옆에 우동도 그렸다고. 엄마가 안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진짜 끓여줬다며, 아이는 마법 노트 덕분이라면서 환하게 웃었다.


아이에게 그 우동 한 그릇은 단순한 저녁이 아니었다. 그림 속 소원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고, 나는 그 마법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작은 배려가 아이에게 커다란 기적이 되었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남편이 준비하고 있는 자격증 사진이 보인다. 그 옆에는 내가 다음 차로 사고 싶은 GV80, 남편이 살고 싶어 하는 도곡동 주상복합아파트, 그 아파트 거실에 놓고 싶어 하는 그랜드피아노 사진이 붙어 있다. 매수를 목표로 하는 삼성동의 한 건물 사진과 함께.


남편은 요즘 6년 후 입주할 (정확히는 '하고 싶어 하는') 집 인테리어를 매일 찾아본다. 인테리어 포스팅이 새로 올라올 때마다 내게 링크를 보내며 어떤 스타일이 좋은지 묻는다.


나는 대충 훑어보고 넘길 때가 많다. 지금 내 머릿속은 전혀 다른 문제로 바쁘기 때문이다. 작은방에 아이 침대와 책상이 들어갈지, 거실 매트는 언제 치울 수 있을지, 현관 곰팡이는 어떻게 처리할지가 더 시급하다.


남편은 혼자 꿈꾸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이사 갈(정확히는 '가고 싶어 하는') 건물에 기계식 주차장이 있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내가 무심코 말했다.


"우린 SUV 탈 거라 기계식 주차 못해."


순간 남편의 표정이 환해졌다. 내가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느낀 모양이다. 아마도 그의 오랜 꿈이 내 머릿속에도 조금씩 스며든 걸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남편은 그 한마디에서 '우리의 미래'를 본 듯했다.




꿈은 조금씩 현실에 다가온다. 아이가 봉지를 보고 젤리를 얻었듯, 노트에 그린 우동이 식탁에 올랐듯, 남편이 붙여둔 사진들이 내 머릿속에 스며든 것처럼.


왕꿈틀이 봉지, 마법 노트 속 우동, 벽에 붙은 사진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현실에 가까워졌다. 눈에 보이고, 마음에 새기고, 반복해 떠올린 끝에 행동이 이어진 것이다. 거기에 누군가의 마음이 더해지면 진짜 마법이 된다.


꿈은 멀리 있지 않다. 오늘 눈에 담고, 마음에 안고, 서로의 마음으로 물을 주는 순간부터 이미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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