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강의에서 정조의 편지 한 구절을 읽었다.
임금이 되고 20년, 궁궐에서 정치에 매진하다 문득
늘 편지왕래하던 9살 위 외삼촌에게 보낸 것이다.
드물게 정조의 서정을 만날 수 있는 글이다.
“이제 다시 예전처럼 노닌다 한들 그 옛날과 같은 기분이 날까요?”
이 말에 울림이 있다.
어제 15년 세월을 함께 한 지역모임 푸른와부의 추억을 반추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도 모임은 이어지지만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중년의 안정은 있으되 경쾌함은 어디로 갔는지.
영하의 겨울, 정조의 쓸쓸함에 한 발 담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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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의 빼어난 산수는 경기 일원에서 으뜸입니다. 내가 세손으로 있을 때 때때로 몰래 대궐을 빠져나와 유람할 때면 늘 외삼촌과 함께 다니곤 했지요. 이제 와 돌이켜보면 전생의 일처럼 까마득할 뿐, 그런 놀이를 다시는 하지 못합니다. 가을날 문득 대궐 안에 오똑하게 앉아 있자니 사방 산에는 단풍과 국화가 한창이라 도봉산에 노닐던 지난날과 다름이 없습니다. 옛 일이 떠올라 감회를 주체하지 못하고 몇 줄 써서 외삼촌께 받들어 올립니다. 딴은 예전에 있었던 일을 추억하는 것이지만, 이제 다시 예전처럼 노닌다 한들 그 옛날과 같은 기분이 날까요? 그저 한없이 부러워만 할 뿐입니다. 을묘년 국화 핀 가을날 국사에 바쁜 여가에 씁니다.
- 정조어찰, 고대소장본 (1795), 안대회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