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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지 Aug 13. 2019

보존에의 욕구 - 기록을 남긴다는 것

향수, 미라, 그리고 니엡스까지

2007년 3월의 글.


아침 녘 욕실에서 뿌렸던 향수의 향기가 자정에 가까운 지금까지 남아있다. 가만있자, 이게 환각은 아닐 거고, 문을 닫아두고 나가서 입자가 아직 남아있나 보구나. 가만히 앉아 생각해본다. 향기를 느끼는 건 뿌려두었던 향수의 입자가 후각을 자극하고 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어서겠지. 그런데 향기가 전달해준 건 입자를 통한 후각적 자극뿐만이 아니었다.
 
향기는, 손가락 사이로 공기가 새어 나가듯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되돌려 아침 녘으로 날 이끌고 있었다. 아침에 향수를 뿌리는 소리를 듣고 친구가 한 우스개 소리, 그리고 향수를 뿌리면서 웃고 있었던 나, 그 장면 속에서 내가 느꼈던 느낌이 제 3자의 것에서 다시 나의 것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향기를 통해 하루 분량만큼의 시간 속에 덮인, 저 몇 겹의 레이어 뒤로 가상적 시간이동이 이뤄졌다고나 할까.
 
후각 입자가 하루 정도를 살아남아 과거의 기억을 재생시켜준다면 청각은, 또 시각은 어떨까. 수백만 겹의 신경세포 사이사이에 들어있을 과거의 소소한 기억들을 자극시켜줘. 내가 '그' 때 '그'렇게 웃었고 '그'런 생각을 했었던 '그'렇게 살았던 '그' 때로. 이제는 지시대명사로 밖에 쓸 수 없게 된 ‘그’ 때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무너진 다리의 모양은 잊히고 지나온 사람들의 이름은 희미해지는데. 그렇지만 괜찮아, 사진이 있잖아. 졸업앨범을 보니 이 친구가 생각나네. 기록영화를 보니까 내가 알 수 없었던 시대의 삶도 유추할 수 있구나.
 
국문학에서 고전을 읽을 때 가장 강조하는 자세가 ‘그 시대의 마인드로, 내가 그 시대 사람이라 가정하고 들어간 텍스트 속에서 당대의 모든 것을 흡입해라’인데 이러한 접근방식을 통해 텍스트 역시 ‘체험과 회귀’를 위한 매개물(Medium) 역할을 함을 알 수 있다. 다른 세대들이 살았던 과거를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내가 살았던 현시대의 과거를 잊지 않고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닿아있다. 삶의 영속성과 연속성에 대한 증거를 원하는 것 말이다. 그것이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공포를 잊게 만들어줄 테니. ‘망각을 위한 재현.’ 모순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결국 우리는 ‘죽기 위해 살아가는 셈’이니 삶은 이토록 아이러니하다.
 
결국 현대에 와서 시각예술(영상예술)이 기술의 발전을 통해 가장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가장 쉽게 복제되고 가장 구체적으로 실감 나게 재현될 수 있는 Medium이기 때문 아닐까. 이제는 상상력의 동원 없이 시각적 자극만으로 장면을 인지하고 느낄 수 있다. 제작 단계에서도 텍스트를 통한 ‘장면화’는 매우 어려운 반면 시각매체를 이용한 장면화는 그야말로 ‘복제’에 근접해있다. 물론 장면을 시각화시키는 사람의 주관적 해석이 어떤 사실과 장면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는 없게 만들겠지만, 타 언어에 비해 시각언어는 장면화와 기록에 관련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따라서 늘 더 실감 나게 더 자극적인 장면을 통해 체험하고 기억을 재생시키려는 현대인의 본능과 잘 들어맞는다. 자연히 앞으로는 가상현실 기술의 발달이 예정되어 있을 것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의 근원에 카메라 옵스큐라가 있고 그것의 근원에 회화가 있고 미라가 있었다.
 
미라(Mummy)콤플렉스. 나 역시, 잡을 수 없는 시간과 한정된 삶 속에서 ‘영생’이란 개념에 목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남기겠다는 진부하고도 거창한 동기로 작업을 시작하는 것. 개가 오줌을 누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과 달리 인간은 좀 더 고도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그렇기에 예술적 욕구의 발현은 ‘흔적 남기기’를 넘어서는 복합적 요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아의 발견과 표현. 표현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은 심정. 왜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 하고 소통하려 하는가. 탐미주의와 계몽주의의 중간쯤 서서 지금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기 위해 다시 과거를 들여다본다.
 
그들은 왜 몸을 보존해야 했고, 장면을 그림으로 남겨야 했고 이것에도 만족하지 못해 사진을 발명해야 했을까. 결국 이 질문은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문득 니엡스(Joseph Nicéphore Niepce)가 좋아졌다. 니엡스에 대해 들으며 그 시절로 나를 이끌고 가본다. 모험과 발명으로 분주했던 삶. 니엡스에게 갑자기 무한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모험을 하고 무엇인가 만들어낼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지 않는가. 그 시대에 천진난만한 호기심을 가지고 박진감 넘치게 살았을 니엡스가 보인다. 나는 지금까지 ‘알기’보다 ‘하기’를 모토로 생활해왔다. 그런데 역사를 접하면서 창조에 있어 기본적인 철학과 역사적 지식만 흡수해도 많은 아이디어 창출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환상이 현실 위로 흐르며 그것은 기억 위에서 반짝이고 그것은 또 꿈과 섞여 들어가며, 또 악몽으로 변하고, 또…’  형식(기술)은 곧 내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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