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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기 Jul 14. 2021

팬데믹을 견디게 해주는 것들 2. 질문들

 ‘견디다’, 말 자체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몇 년 전 취준생으로 지낸 근 2년을 견디고 버틴다는 감각으로만 살았었다. 아니, 살았다는 표현은 빼버리자. 그때의 나는 정말 하루하루를 견디기만 했다. 살 마음이 들도록 해달라며 먹고, 기도하고, 사랑을 했지 나는 정말로 살아있지 않았다. 살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고 타지에서 스스로 방값에 생활비를 충당하며 밥벌이를 하는데도 그랬다. 1년짜리 계약직이었고, 커리어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정말 입에 풀칠하며 취업준비를 하기 위한 일이어서 더 그랬다. 그러다 어느 날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남아 자소서를 쓰다가 깜빡이는 형광등을 보면서 취업보다 그저 그대로 사라지기를 빌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나를 원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취업난은 우리 세대에 주어진 숙명이어서, 그저 견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노오력은 물론 했다. 수치적으로 갖춰야 한다는 스펙은 다 갖추고 지원해볼 만하다는 기업은 위부터 아래로 다 넣어봤다. 하지만 겪어본 이들만이 알고, 겪을 만큼 겪고 취업한 이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요즘의 취업난은 노오력 이상의 무언가 인지 오래됐다.


“걔가 그 스펙으로 거길 들어갔다고?”

별 준비도 없이 대기업에 쉽게 입사했다는 대학 동기의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다.


“햐, 요즘 애들은 이런 걸 다 알고 들어와? 나는 여기가 뭐하는 데인지도 모르고 들어왔어.”

인턴이지만 사람이 달려 그 이상의 업무를 수행하다, 학교 밖을 뽈뽈거리며 다녀 배운 것을 써먹자 상사가 말했다.


“직무가 너무 안 맞아서 이직 생각 중이야, 회사는 안정적인데... 이게 맞나 싶고...”

사는 게 이제 겨우 반 오십인데 삶이 그저 이대로 끝날까 봐 두렵다며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털어놓았다.


“A기업은 임원의 자녀를 이른바 ‘낙하산’으로 부정 채용하여...”

 식당에서 틀어놓은 TV에 모자이크 된 화면이 나오고, 기자가 목소리를 높여 고발 중이다.


지금은 취업시장에서 몇 발짝 떨어져 있어 또 트렌드가 어떻게 바뀌었지는 모르겠다. 2015년~2017년쯤, 내가 겪은 취업 시장에서 기업들은 채용 설명회에서 스펙은 안 본다며 설명회를 여는 학교는 고르고 고르고, 스펙으로 원서를 가른다는 소문은 파다한 이중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 건너 건너 아는 동기처럼 특별한 스펙 없이 취업한 사람도 있어 더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지나고 보니 부정채용도 심심찮게 있었고, 취업하고 보니 대학에서 배운 것과 회사에서 원하는 것은 차이가 있거나, 회사에서 알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미디어들은 발 빠르게 산업구조, 세대격차, 20대들이 받은 교육과정 등등에 대해 조명하며 원인이랍시고 이거 저거 짚어냈다. 그러면 뭐하나, 결국 바뀌는 것은 없었는데.


희한하게, 나는 뉴스에서 요즘 20대들의 사회현상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다 거쳤다. 뉴스에 내 삶이 연일 보도되는 격이었다. 어찌나 그렇게 트렌드를 잘 맞춰가는지, 한 시즌에 원서를 100개씩 넣는다는 취준생, 1년도 안되어 퇴사하는 신입사원, 재취업을 희망하지만 6개월 이상 취직이 되지 않은 자, 구직단념자를 순서대로 밟았고, 가파르게 치솟는다는 20대 번아웃과 우울증 그래프에 숫자 1을 기여하기도 했다. 그렇다. 견디는 것은 취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취업이 되고 나서도 나는 얼마간 부당한 상황들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견뎌야 했고, 결국 견디는 걸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처진다. 이렇게 견뎌야 하는 상황들은 보통 원인이 외부에 있으며, 스스로 당장 해결할 수 없을 때 시작된다.


삶의 개인적인 영역이 비로소 평온해져도, 견뎌야 할 것은 계속 생기는 모양이다. 오늘 친구가 코로나 잔여백신에 집착을 하더니 넌더리가 난다며 말했다.


“이만하면 전시상태 아냐?”

“난 작년부터 준 전시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어.”


진짜다. 나는 2번째 확진자가 나왔다는 뉴스 화면을 보면서 인터넷으로 마스크를 주문했다. 그 바람에 마스크 가격대란을 용케 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바이러스가 팬데믹을 일으키고, 이번 여름까지 이렇게 창궐할 줄은 몰랐다. 비교적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복용 중인 신경안정제의 효과도 부정할 수 없지만, 나는 취업과 직장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며 견뎌야 했던 시간에 얻은 것으로 이 사태를 견뎌내고 있다. 바로, 질문을 하는 법이다.


첫 회사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나온 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할 때였다. 그때 도움이 되었던 말은 “질문을 똑바로 해.”라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돌아보니 나는 나에게 질문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왜 그때 그렇게 했어?”. “다시 돌아갈 수 없을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다르지 않을까?” 라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과거의 후회는 마치 늪과 같아서, 나아갈 힘을 스스로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다르게 해 보기로 했다.


그때 새로 만든 질문은 “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하나밖에 없었다. “블로그를 돌아다니다가 본 인도 콜카타 마더 테레사 하우스에 가서 봉사를 하면서 생각할 시간 좀 가질래.” 그래서 나는 그 길로 2주 만에 인도로 떠났고 - 맞아야 한다는 백신을 일주일 만에 몰아서 맞고 몸살이 났다- 모두의 걱정 속에 무사히, 추억거리를 가득 안고 돌아와 그 이후로 나는 내게 맞는 질문 계속 찾아 던지면서 또 다른 길을 찾고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제법 효과가 있다. 경험상,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부정적인 생각들은 질문으로 가장한 자책이거나 아주 확률이 낮은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부터 제대로 된 질문인가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좋거나, 새로운 답이 나온다. 여전히 잘못된 질문의 함정에 빠지고 있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각도 부족하긴 하지만 나는 질문을 던지고, 머리와 경험으로 오답노트를 만들면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보고 있다. 그러다 보면 견뎌야 하는 상황이 가능성을 찾아내 시험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조금은 흥미로워진다. 그래서 나는 질문들을 통해, 이 팬데믹 속에서 그저 ‘견뎌야만’하는 지루함을 이겨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질문은 바로 이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읽을 만한 글을 쓰고 있는가?”


질문이 제대로 된 것일까?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고, 써야 할까? 우선, 위 질문의 답은 이 글을 읽은 여러분에게 맡기겠다.


P.S 혹시 팬데믹 속의 취준생이 이 글을 읽은다면,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다해 따뜻한 위로를 보냅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좋은 날이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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