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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Mar 23. 2016

원격 근무는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다

가족이 중요한 건 아시죠?

아래는 <출퇴근 없는 삶>의 목차이자 시리즈 첫 글




"오늘도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못했다. 어머니, 동생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내 방에 들어와 다음 주에 있을 고등학교 시험공부 준비를 하고 있으면, 자정이 넘어서야 술에 취한 아버지가 집에 도착하신다. 술에 취해 현관문을 여는 손이 계속해서 미끌릴 때면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 자는 척을 한 적도 있다. 아니, 자는 척을 한 날이 훨씬 많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술에 취해 했던 말을 하고 또 하시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그러다 가끔은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인사를 하면, 맨 정신에는 애정표현을 못하던 아버지의 '사랑한다'는 말에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곤 했다. 술에 취해서만 아버지는 사랑한다고 말하셨고, 다음 날이 밝으면 다시 다정하지만 애정표현에는 인색한 분으로 바뀌셨다."


우리 부모님 시대는 돈을 조금 더 벌기 위해서라면 개인 시간을 포기하는 그런 때였다. 그게 어디 당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였을까? 다 안다. 자식에게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자식이 더 나은 교육으로 더 넓은 세상의 기회를 맛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술에 취해 들어온 아버지가 사랑한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때면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원했던 것은 아버지가 벌어오시는 돈으로 더 비싼 학원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비싼 옷을 몸에 두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저녁 시간에 온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그 날 하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웃으며 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일 년에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으면서, 우리 가족은 피를 나눈 사이였지만 조금씩 거리가 생겼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나는 학창 시절 공부를 핑계로, 그리고 부모님은 회사 생활의 바쁨을 핑계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아버지들은, 아니 요즘 부모는 다르다. 물론 자의로든 타의로든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도 많을 거다. 자식은 부모를 비판하면서도 닮아간다. 하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위의 기사는 요즘 부모들이 어떻게 다르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지 잘 보여준다. 아직까지 아빠가 자녀를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겪어야 했을 사회적 압박감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자녀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감동이 얼마나 큰 가에 대한 것이다.


나는 감히 휴직 말고도 원격 근무를 통해서 자녀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원격 근무는 '집에서 노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이다. 스스로 시간을 정해놓고 주어진 업무량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래의 글에서 밝히는 것처럼 육아를 책임지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일의 생산성이라는 측면에서 절대로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원격 근무는 스스로 근무할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갈 때가 되면 하루에 일정 시간은 업무 시간으로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업무 시간을 방해 받는 이 '불편함'을 감내하지 않는다면, 내가 혹은 내 배우자가 10달이나 배 아파서 낳은 아이가 훌쩍 커서 20년 후에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아이로 자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두 다 그렇게 살아."라고 이야기할 문제는 절대로 아니다. 인간은 사랑이 필요한 동물이다. 그 누구도 돈 만으로 살 수는 없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추억을 만드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거 같다. 


"내가 갓 태어났을 무렵, 아버지는 중요한 진급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갓난 아기인 나를 어렵사리 떼어놓고 보름 정도 고시원 단칸 방에서 퇴근 후에 홀로 진급 시험을 준비하셨다고 한다. 그러다 주말에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그 방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안고 소리내어 우셨다고 한다."


아버지라고 어린 자식의 재롱을 보고 싶지 않았을까. 보고 싶은 자식을 떼어놓고 혼자 있는 것은 얼마나 참기 힘들었을까. 하지만 나는 나의 자식에게 '항상 희생하는 모습에 아련하고, 죄송스러운' 그런 부모가 아니라, '항상 내 옆에 있어주고, 인생에서 가장 좋은 친구'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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