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었던 그 사람
아래는 <인문학도, 개발자되다> 목차이자 첫 글
2013년 2월, 브라질에서 한국으로,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왔다. 사람들이 바뀌었다. 스페인과 브라질에서는 그 누구도 취업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다. 물론 한참 스페인 경제가 곤두박질 치느라, 그리고 스페인과 브라질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아예 취업과 상관 없을 정도로 나이가 어리거나 아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고, 나의 모험을 지지해주었다. 나와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나일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고 졸업까지 1년이 남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취업 이야기만 쏟아냈다. 인생의 방향과 꿈은 배부른 소리였고, 목표는 오직 초봉을 많이 주는 회사에 입사하는 것이었다. 남은 두 학기 중에 첫 학기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잠시 멀어졌던 대학교 공부였지만, 그래도 3년 간 쌓인 내공으로 적당히 공부하며 적당한 학점 받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한 학기를 앞둔 방학이 되자 많은 것들이 숨막히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학교 취업센터의 취업 연계 수업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무엇을 할지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대학생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회사에 들어가서 하게 될 직무 교육을 받고, 자기 소개서를 고쳐쓰고, 그리고 모의 면접을 받았다. 누구도 내가 이걸 왜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고, 마치 내르막 외길에 커다란 바퀴가 굴러 내려오고 있는 것처럼 앞사람을 밀치며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막 뜀박질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게 내 눈 앞에 직면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생각해 본 적 없던 새로운 세상이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여느 대학생과 다르지 않게,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연봉을 주는 모든 회사에 일단 지원했다. 나는 분명히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회사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 서류 통과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원하는 회사님께서 나를 선택해 주시는 것을 기다리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몇 달 간의 긴 좌절의 시간 끝에 그래도 운 좋게 은행 하나, 외국계 IT 회사 하나, 그리고 무역 상사 하나에서 최종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고민하던 끝에 무역 상사에 지원했다.
그것이 취업 시즌을 시작하면서 세웠던 '전세계를 누빌 수 있는 비지니스'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막내였다. 집에 가라고 하기 전에는 집에도 갈 수 없었다. 카페에 가면 커피 주문 및 배달을 해야했고, 식당에 가면 테이블 세팅을 순식간에 마쳐야 했다. 하지만 가장 끔찍했던 건 회식이었다. 회식은 보통 저녁 7시부터 시작 했는데, 나는 항상 한 시간이 채 되기 전에 필름이 끊어졌다. 그리고 술자리는 자정 넘게까지 이어졌다. (기억이 없으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렇단다.) 일주일에 적어도 3번이 넘는 회식을 부모님이 자랑스러워 하신다는 생각을 하며 버텼다. 얼굴은 잿빛이 되어갔고,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얼굴이 어두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회식으로 떡이 된 다음 날 아침,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어제 입고 잠든 양복을 그대로 입고 출근하면서, 올라오는 구역질에 잠시 내려 버스 정류소 화단에 다 토하고 다시 올라 탔다. 그리고 오전에도 두어 번 회사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박고 다시 게워내는데 난 도저히 더 못하겠더라. 아침이면 바닥에 굴러 너덜너덜해진 양복과 언제 다쳤는지도 모르는 시큰 거리는 손목, 그리고 며칠 전에 술에 취해 집에 가다가 화단에 얼굴을 박아 흙을 가득 묻은 얼굴로 집에 들어갔다는 2년차 선배의 자조 섞인 이야기에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겹게 하루 하루를 버티는데 지금은 부인이 된 여자친구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었다. 그녀에게도 매일 같이 새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는 것은 정말 마음 아프다고 했다. 첫 회사의 퇴사를 어렵사리 고민하고 있던 무렵, 그녀는 내 결정을 진심으로 지지해주었다. 어렵게 들어온 회사는 회식과 군대 같은 조직 문화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였지만 쉽사리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글쎄 내가 과연 그만 둘 수 있었을까? 지금도 술에 찌들어 눈치보며 하루를 보내는 대리가 되어있지 않을까?
그렇게 난 미련 없이 그만뒀다.
나는 내가 포기했던 IT 산업으로 눈을 돌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문과생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IT 영업일 수 밖에 없을 것 같았고, 개발을 배워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도 최소한 개발을 이해해야 개발자들과 의사소통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한국 개발자의 처참한 업무 환경에 대해서 듣게 됐지만, 일단 내가 먼저 경험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2년 고생하더라고 꾹 참아서 외국에 나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개발자가 되었다.
인문학도가 개발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저는 자유를 사랑합니다. 재택 근무를 알립니다.
나는 전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비지니스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