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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Dec 22. 2016

장가가던 날

사진 같이 남아있는 그 날의 기억

결혼식은 누구에게나 일생에 가장 소중한 날이다. 두 사람의 마음이 모이고, 두 가족이 하나가 되는 그 날은 많은 사람 속의 축복 속에 이뤄진다. 한편 결혼식을 올리는 당사자는 정작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그간의 긴 준비가 하루 만에 빛을 발하는 그 순간이기도 하다. 며칠 전은 결혼식을 올린 지 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사귄 지 1주년에 맞춰 미리 혼인 신고를 하고 신혼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던 터라, 결혼식을 올린 후 아직 결혼하지 않은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의 "결혼하면 뭐가 달라?"라는 질문에 "별로 달라지는 건 없다."라고 말하며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다. 페이스북에 2년 전 사진이라며 올라오는 사진들을 부인과 함께 찬찬히 살펴보며 그 날의 기억을 다시 꺼내보았다. 그리고 2년 전 그 날의 기억이 가장 선명할 오늘, 그 날의 기억을 남겨보고 싶어 졌다.


왠지 모르겠지만 결혼식 전 날에는 부인과 같이 있어야 할 거 같다는 기분이었는데, 결혼식 전 각자의 가족과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라며 내 고향에 내려와 따로 떨어져 전날 저녁을 보냈다. 그날 오전까지 함께 있었는데, 뭐가 그리 아쉬운 지 밤늦게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잠을 청했다. 결혼식 날 아침은 참 많이 바빴다. 신랑, 신부, 특히 신부와 양가 어머님은 특히 신경 쓸 부분이 많다고 결혼식 올리기 약 4시간 전에 웨딩샵으로 향했다. 부인님 드레스와 메이크업을 여기로 하기로 했고 식장까지는 차로 10여 분 이동해야 했는데, 사람이 많은 주말 예식이라면 가능한 식장에서 도보 거리에서 이동을 하는 게 가장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식에 참여하기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당일은 정말 차가 많이 막힌다.


웨딩샵에 도착하자, 부인님과 장모님은 이미 도착해서 메이크업을 받고 계셨다. 새벽같이 일어나느라 당연히 아침은 챙겨 먹지 못했는데, 부인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며느리가 배가 고프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새 신부가 배가 고프면 안 된다며 근처에 문 연 곳도 없었을 텐데 어디에서 먹을 걸 가져오셨다. 메이크업을 받고 식장으로 이동하는데, 서울 친구들을 태워오는 대절 버스가 식장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우리 결혼식을 보러 주말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오는 친구들을 생각하니 참 미안하기도 감사하기도 했다. 특히 일본과 대만에서 유학을 했던 부인님의 친구들 중에서는 전날 한국으로 들어와 아침에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식장으로 내려온 사람도 있었는데, 어지간하면 외국으로 결혼식을 보러 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고마웠다. 마지막으로 1시간 전에 식장에 도착해야 되는 혼주가 식장 가는 길이 너무 막혀서, 식장 앞에서 버스 인솔까지 해줬던 고등학교 친구에게 차 키를 맡기고 식장으로 뛰어 올라가야 했다. 결혼식에 소중한 손님으로 와준 친구에게 너무 일만 부탁해서 그 친구 결혼식은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맡기라고 이야기했었다.


식장에 올라가니

이미 친구들은 다 도착해있다. 내가 아니었다면 평생 올 일이 없었을지 모르는 도시에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와준 친구들, 그리고 오랜 세월 함께한 초등학교 친구,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결혼식장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도 다 눈에 들어온다. 식장에서 준 하얀 장갑을 끼고 수많은 부모님 지인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먼 길 와준 친구들과도 하나하나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혼을 빼고 있는데 갑자기 신부 대기실로 불려 들어갔다. 너무나 아름다운 내 신부님과 사진 촬영을 한다. 여러 번 얼굴을 봤던 부인 친구들이 신부 대기실에서 이 날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으로 남긴다.


1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흘러간 적이 잘 없었던 것 같다. 식장 관계자가 "신랑님 입장 준비해주세요."라는 말을 한다. 그 말과 함께 아버지, 어머니와 식장으로 들어가는데 식장에 가득 차 있는 하객들이 나를 쳐다본다. 어두운 실내에 중간에 난 길로 강한 조명이 빛을 비춘다. 이 날 가장 떨리는 순간. 좋은 날 당당하게 입장하고 싶어서, 긴장을 달래며 결혼식 준비하며 단련한 사진 찍히기 웃음 스킬을 발휘한다. 강한 조명 아래 좌우를 살펴보며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 와준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하지만 너무 어두운 실내조명과 내 위의 조명이 배치되며 친구들, 친척들, 지인들의 얼굴이 아른아른 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신랑 입장

드디어 행진곡이 들리고 내가 빠르게 걷는지 느리게 걷는지, 팔은 제대로 앞뒤로 휘젓고 있는지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발을 내디뎠다. 그래도 결혼식장에 입장하고 단상에 가까워지면서 마음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 다시 내가 방금 서있던 그곳을 바라본다. 이제는 하객들의 얼굴이 더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앞에서부터 부모님,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제법 잘 들어온 거 같다.


그리고 신부 입장

새 신부가 장인어른의 손을 잡고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그런 새 신부의 손을 잡으러 다시 조금 걸어나간다. 새 신부의 손을 건네주는 장인어른의 눈시울이 붉다. 정말 가족을 사랑하는 장인어른, 그리고 특히 그 가정의 첫째 딸의 손을 다른 한 남자의 손에 건넨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버지의 얼굴은 내 눈시울도 붉혀 놓았다. 결혼식을 올리며 눈물을 흘릴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겨우 마음을 추스른다. 그렇게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단상을 향한다.


양가 어머님께서 촛불을 밝혔다. 시를 쓰시는 외할아버지께서는 축시를 읽어주셨다. 아버지는 며느리와 아들에게 직접 쓴 편지를 읽어주셨다. 우리는 함께 성혼 선언문을 읽었고,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이 축가를 부르며 우리의 결혼식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각설이 노래와 함께 밀짚모자를 손에 들고 춤을 추며 이미 축의금을 다 내신 하객분들에게 한 번 더 신혼여행 노잣돈을 강요하기도 했다.


식이 끝나고

바로 폐백을 하러 이동했다. 따로따로 절을 드리고 친척분들께 덕담을 들었다. 폐백이 끝나고 나오자 거의 하객분들은 이미 식사를 마쳤고, 서울로 먼저 올라가야 되는 친구들은 이미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지친 몸과 주린 배를 부여잡고, 친구들과 함께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서울에서 온 친구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그래도 늦은 시간까지 같이 남아 이야기를 나누고 술잔을 기울였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2차 서울행 버스를 돌려보내고, 외국인 친구들을 숙소로 택시를 잡아서 보냈다. 그리고 피곤할 거라고 잡아주신 호텔이 하필 똑같은 이름으로 두 곳이 있어서, 호텔에서 다시 호텔로 이동을 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부모님께 결혼식 할 때 어땠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하나도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는 답변이 이해가 되면서도, 그 날의 기억을 선명히 들려주시는 부모님의 이야기와 그렇게 바빠도 그 날의 기억이 사진처럼 머리 속에 남아있는 나를 보면 정말 아름답고 소중한 날은 틀림이 없다. 내가 그녀와 함께 한 이후부터 진짜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결혼식 그 자체는 하나의 큰 행사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그녀와 내가 쌓아올리는 소중한 추억의 사진첩 속에 제법 큰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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