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일, 새로고침> 후기
다른 나라에 나가서 살다 보면 내가 살던 나라에서 강요받던 성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더 와 닿을 때가 있다. 군대를 전역하고 남들이 다 가는 곳으로는 나가기 싫다며 스페인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스페인에서 처음 느꼈던 '이상한' 점은 한국에 비해 남성의 목소리 톤이 높고, 여성의 목소리 톤이 낮다는 것. 그때 처음으로 목소리 톤도 문화에 따라 결정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에게는 낮고 울리는 동굴 보이스를, 여성에게는 간지러운 애교 섞인 목소리를 사회에서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을 통해서 각각 남성으로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성역할에 충실하게 만드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스페인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가끔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면 짐 들어주겠다는 이성 친구의 제안을 받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나는 으레 '남자답게' 거절하고 말았는데, 한 번은 "마초맨"이라는 대답과 어깨 으쓱거림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 남자도 여자 도움받을 수 있는 거지.
그렇다. 나는 20년 넘게 한국 사회에서 '남성'으로 자라왔다. 내가 가끔 풀어내는 한국 사회에서 남성평등에 관한 이야기는 결코 내가 잘났기 때문이거나, 여성 문제에 대해 잘 알아서가 아니다. 그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어느 순간 모순되다고 느낀 그 내면의 순간을 혼자서 조용히 마주했을 뿐이고, 더 이상 내 안의 모순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을 내렸고, 그걸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일 뿐이다.
결혼을 하고 보니 여성이 처한 어려움이 더 눈에 보인다. 정말 죄송스럽게도 20년 넘게 나를 뒷바라지 해온 어머니의 고생은 그 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잘 다니던 직장을 동생을 낳고 그만두셨던 것,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사업 때문에 하교한 후에 집에 거의 안 계셔서 자식들이 집에 돌아올 때 항상 반갑게 맞아주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것도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어머니라고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없으셨을까? 완벽주의자 성향이 강해서 집안일도 하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만약 사회생활을 했다면 나는 큰 성취를 이루셨을 거라고 확신한다. 지금껏 살면서 그렇게 열정적이고 똑 부러진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물론 어머니가 직접 내리신 결정이고 그것으로 어머니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행복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어머니에게 "당신의 인생을 희생하며 살아오시게 해서 죄송하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오히려 어머니의 사랑을 욕보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머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채워온 어머니 스스로 결정한 과업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나는 나의 부인이, 이 시대의 젊은 여성들이, 그리고 우리의 딸들이 자신의 인생을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희생하면서 살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너무나 자발적으로 '어머니'의 삶을 결정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워킹맘을 바라보는 차가운 사회의 시선 때문에, 그 돈 벌어올 거면 그냥 집안일 하라는 남편의 권유 때문에 '어머니'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녀들도 이 사회의 주역으로 멋있게 활약하고 이름을 날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다 <여성의 일, 새로고침>이라는 책을 만났다. 책을 읽는 내내 셰릴 샌드버그의 <Lean In>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곽정은, 김희경, 김현정, 장영화, 은수미 이 멋진 다섯 여성의 풀어내는 여성의 사회 생활 이야기는 그녀들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 한 구성원으로 인정 받기 위해 겪어야 했을 고통과 지금 그 자리에 있기 위해 들인 수많은 노력을 엿보게 했다. 이혼하고 더 멋진 제2의 삶을 살아가는 섹스 칼럼리스트, 변호사 출신 사업가, 방송국 PD, 기자 출신 NGO 직원, 국회 의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여성들은 입을 모아서 말했다. 이 사회는 여성에게 너무 잔혹하다고.
여성도 사람으로 멋있을 수 있다. 존경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존경은 남성의 몫이었다. 여성은 외면의 아름다움으로만 평가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여성도 자신의 꿈이 있고, 능력이 있다. 여성은 어머니이기 전에 사람이고, 사람으로서 스스로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도전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너무나 멋있고, 에너지로 충만한 내면이 아름다운 여성들을 만났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책 읽은 내용을 나누며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 존경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나는 만나보고 싶었다. 나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여성이 많아질수록 여성들이 존중 받는 세상이 오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은 내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린 국회의원 은수미씨의 한 마디.
단 한 번도 기득권은 거져 내놓는 법이 없습니다. 비아냥이나 정치 불신으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당당하게 빼앗을 방법을 생각해보세요.
나는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빼앗긴' 사회 진출의 기회를 되찾고, 당당히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중받길 원한다. 소위 한남충이라고 불리는 여성 문제에 부정적으로 대응하는 남성들도 존재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여성들과 함께 양성 평등을 위해 싸울 남성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덤으로 평소에는 잘하지 않는 상세한 구매 링크까지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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