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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Apr 12. 2017

서울, 상해, 도쿄의 친절

돌고 도는 친절의 굴레

얼마 전 일본에 벚꽃이 막 필 무렵 일본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도쿄에 갔다. 부인님께서 학창 시절 도쿄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터라 친구도 많고 추억도 많아서 한 번씩 들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운 좋게도 벚꽃이 흐드러진 시기에 동경을 방문할 수 있었다. 맛있는 음식이 정말 많은 일본이기 때문에 가기 한참 전부터 일본에 가서 먹을 음식 목록을 정리하고, 일본에 도착해서 관광보다는 맛있는 음식에 집중한 아주 좋은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에 가서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제법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본 사람들의 태도는, 물론 내가 그 질서의 수혜자라는 점에서 한 편으로는 편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나 역시 그 수준의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점에서 꽤나 피곤하게 느껴졌다. 특히 상해에서 1년 간 다른 사람의 눈치를 크게 보지 않고 편하게 살아왔던 터라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상해 살이도 처음부터 편하지는 않았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지하철에 처음 도착했을 때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어깨를 거칠게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중국에 왔구나.' 생각했다. 여러 국제 행사를 치르면서 많이 나아졌다고 하고, 그리고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발전된 상해에서 살고 있어서 상해와 다른 중국의 여러 지역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상해는 중국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도 듣곤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길거리에서 아주 쉽게 침을 뱉고 지나가거나,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적응이 안될 때가 있다. 식당에서 음식이 다 나왔는데 밥이 안 나와서 종업원을 2~3번 불러서 겨우 나오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 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중국 살이가 편한 것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가게에 들어가도 종업원들은 슬플 땐 슬플 수 있는 자유와 기쁠 땐 기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도 그들에게 친절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이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친절' 일수도 있겠으나, 내부의 사람들에게는 일터에서 다른 사람의 혹은 다른 감정의 가면을 쓰지 않고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서비스로서의 친절'은 감정 노동의 일종이다. 서비스/용역을 구매하는 행위는 구매자가 돈을 지불하고, 판매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서 원래는 끝이 난다. 굳이 친절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소비자는 돈을 쓰면서 서비스 혹은 물건을 받지만, 그와 동시에 친절도 제공받고 싶어 한다. 제공되는 서비스의 기능 중 하나로 '친절'을 원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 원인을 그 소비자가 속한 집단에서 '강요된 친절'을 다른 곳에서 푸는 과정에서 찾는다. 그 '강요된 친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예를 들면 이렇다. 


회사원 A는 이미 열 번도 넘게 고친 기획서를 다시 부장 B에게 가져갔다가 퇴짜를 맞았다. 제대로 된 피드백도 받지 못하고 다시 기획서를 고쳐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A는 '부장님께 웃으며' 다시 고쳐오겠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야근을 하기 위해 주변 식당에 간 A는 음식이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왜 이렇게 음식이 늦게 나오냐"며 소리를 지른다. 종업원 C가 달려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한다. 이 종업원 C는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가서 부모 B에게 한껏 짜증을 부린 채 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 부장과 부하 직원

- 식당 종업원과 손님

- 부모와 자식


다소 작위적인 이 예시에서, 돌고 도는 이 세 가지 형태의 관계는 독립적인 관계로 보이지만 각자는 내부의 상하관계를 통해 친절을 강요하고, 이 강요된 친절에서 발생하는 불쾌감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며 다시 친절을 강요하는 형태로 흐른다.   


내가 이번 일본 여행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너무나 친절한 일본 사람들, 그 속에서 너도 나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까 어깨를 접어가며 몸을 구부려가며 자신을 낮추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불편함을 느꼈다. 사회 속에서 한 사람에게 다양한 역할을 부여하고 그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그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잠깐 머물면서, 오랜만에 그 가면 아래 감춰진 짙은 피로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웃음은 좋다. 그리고 쉽게 전파된다. 하지만 내가 접하는 그 웃음이 강요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 강요가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면? 나는 이제 굳이 사람들이 나를 보며 억지웃음을 짓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백화점에 갔을 때, 종업원의 기계적인 웃음과 손짓이 불현듯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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