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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엠미 Oct 25. 2021

<휴먼 카인드>를 읽고

재판장에 들어온 호모 사피엔스

서로 믿기 어려운 시대다. 스포츠 게임처럼 편 가르기 하는 각종 갈등은 혐오와 조롱을 무한 생성하고, 자극적인 범죄 뉴스, 익명성을 담보로 한 폭언과 마녀사냥 등 타인을 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정보들이 매일 같이 쏟아진다. 선량한 이웃의 모습을 했던 사람이 극악무도한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매번 충격을 주고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다음 자물쇠를 걸게 만들고 아이들에게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라고 가르치게 한다. 어쩌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면서 자신도 악조건의 상황만 주어진다면 범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방관하는 자의 모습도 달라졌다. 이제는 물에 빠진 사람도 보고 그냥 지나가는 게 쿨하고 똑똑하다는 풍조가 나오고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없던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정황 증거들을 종합해서 유추할 때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믿음직하지 못하고 경계해야 하며 결함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것 같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했다. 인간의 본성을 악에 가깝게 보고 경계심을 갖는 것은 보다 안전하며 타당하며 정당해 보인다. 이러한 생각에 배심원석에 앉은 대다수의 호모 사피엔스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이러한 생각에 반대 증거들을 내놓았다.  혐의가 많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는 호모 사피엔스란 종에게 위안이라도 주려는 것일까.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그의 아이디어는 순진해 보이고 유용해 보이지도 않다. 유명한 악인들의 얼굴들이 떠오르고 그동안 경험하고 보고 들은 인간들의 악행을 이 무지렁이 변호사에게 무차별 난사하고 싶기도 하다. 야유와 조롱이나 받고 쓸쓸하게 퇴장해야 될 것 같은 이 작가의 책은 어이가 없게도 권위 있는 지식인들과 매체들에서 찬사를 받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배심원석에 앉은 호모 사피엔스 몇몇은 이제 그의 변론을 들어보기로 한다.  



유발 하라리는 전작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신체와 지능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네안데르탈인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결집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보았다. 쪽수로 이긴 것이다. 많은 쪽수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 국가, 돈과 같은 개념들은 실재하지 않으면서 무리를 만들어 결속하게 할 수 있다. 뤼트허르 브레흐만 역시 호모 사피엔스의 승리 요인을 쪽수로 보았지만 내용은 다르다. 그가 제시하는 승리 요인은 바로 '친화성'이다.


많은 영화와 같은 매체에서 원시 시대의 인류는 마초적이고 신경질적으로 그려진다.  브레흐만이 제시하는 자료와 의견에 따르면 오히려 문명 시대 이전에 인간이 더 온순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목적 생활을 하며 수렵 채집인으로서 사유 재산과 계급이 없을뿐더러 세상에 모든 자원을 공유하는 개념으로 살았기 때문에 타 부족을 만나도 싸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친화성은 두개골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락부락한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점점 고르게 변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두개골을 보고 작가는 '호모 퍼피(강아지 인간)'이라고 이름 지었다



문명 시대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 온순하다는 것은 그가 조사한 자료를 통해서 그럴듯해 보인다. 그럼 이제 정착 생활을 하고 농경 사회로 접어들면서 사유 재산과 계급의 발명으로 인해 강점이었던 친화성을 버리고 새로운 본성을 받아들인 것일까? 작가는 현대 사회의 자료들 또한 제시하며 원시 시대의 본성이 그대로 남았음을 증명한다. 전쟁과 고립과 같은 극단적 상황 속에서 다수의 군중들은 서로 약탈하는 패닉 상태보다 서로 도우는걸 택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이었다. 작가는 인간의 본성이 악할 수 있다는 인상을 풍기는 여러 가지 사회 실험들의 오류를 지적했다. 유명한 사회 실험들이 자극적인 실험 결과를 위해 과정을 유도했다는 증거들을 녹취나 자료조사를 통해 제시한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말이 순진하진 않고 그럴듯한 말이더라도 유용하지 않다면 '아 그렇군요.' 하고 말 것이다. 작가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는 것이 유용한 점 역시 여러 사례를 통해 말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사람은 대부분 타인이 기대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좀도둑에서 교도소의 범죄자 심지어 테러리스트까지 선한 본성을 믿고 행동한 결과 훨씬 더 경제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대부분은 이러한 일들을 기적적이고 특수한 사례라고 치부해버리고 만다. 뉴스는 대부분 자극적인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악한 쪽으로 사람들의 확증 성 편향을 키운다. 특히 요즘은 본성이고 뭐고 간에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죄자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냉담한 시선으로 재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교도소에서 더욱 고도의 범죄 기술을 배우고 그들은 돌아와 우리의 이웃이 된다.



용서나 화해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유용성에 관한 문제다. 요즘은 범죄자뿐만 아니라 생각이 다를 뿐인 사람의 본성까지 의심하고 그냥 악하다고 믿어버린다. 서로 믿기 어려운 시대다. 범죄의 크기를 떠나 범죄자는 법원으로 가기도 전에 사회적으로 매장이 돼버리기도 한다. 생각이 다른 타인들을 적의를 품고 뭉개버릴수록 내편과 나는 살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의심하고 쉼 없이 잣대를 들이댄다. 어쩌면 자신 스스로의 본성까지 의심한다. 폭언과 악행(꼭 범죄가 아니더라도)을 저지르고 호모 사피엔스 종 자체가 잘 못 됐다며 합리화하기도 한다. 믿음이 전부 끊어져버리면 남은 건 증오와 파괴뿐이다. 선한 본성을 믿는 것은 순진하고 쓸데없는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유용한 생각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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