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는 불씨를 살려라
앞서 실력이 오르다 정체기일 때 약간의 싫증이 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때는 그래도 아직 습관으로 가지고 싶은 최종적인 목표 거리와 속도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이니 앞으로 성장 구간이 남아있다. 내가 겪었던 런태기는 거의 매일 달리고 싶은 목표 거리와 속도를 모두 이루고 그것을 거의 매일 반복했을 때 생겼다. 계속 달려보니 10km, 45~50분대가 나에게 맞는 최종 목표 페이스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달렸다. 그래서 계속해서 매일같이 45~50분대를 달렸고 만족했다. 이정도면 언제까지고 달리기를 습관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의 매일 10km를 달려 총 달린 거리 1000km를 달성하고 언택트 마라톤도 몇 번 나갔다. 혼자 달리는 대회였고 참가자들에게 모두 주는 기념품과 메달이였지만 성취감도 있었고 ‘정말 러너의 삶을 사는구나’라며 좋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무런 느낌이 안 들었다. 마치 밥 때가 되면 밥을 먹는 것처럼 달릴 시간이 되면 나가서 기계적으로 달리고 집에 와서 씻었다. 도전 같은게 아닌 하루 일과처럼 달리기를 했다. 그러다 지겹다는 느낌이 조금씩 들자 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택트 마라톤 같은 대회에 나가 개인 타이 기록을 세우기 위해 달리기를 연습하는 것도 좋았지만 대회가 끝나고 다시 꾸준히 달려야 할 내 평균 페이스로 되돌아오면 조금 허무했다. 45~50분대로 달리는 평균 페이스를 높이던가 타이기록 10km 40분대를 깨 30분대로 목표를 재설정하면 다시 도전적인 달리기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너무 많이 달려 스스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지금보다 더 빠른 달리기는 꾸준히 할 수 없는 페이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까지 달렸다면 누구나 쉽게 달리기를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런태기를 느끼며 마치 오래된 노부부처럼 달리기와 같이 시간을 지나가야한다. 나는 이 때 달리기 관련 책도 보고, 달리는 장소도 여러군데 돌아가면서 달리기도 하고 새신발도 사보고 달릴 때 듣는 음악도 신경써서 세팅해보고 그랬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쓴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의 매일 10km 달리기를 몇십 년 째 하고 있다. 그토록 오랫동안 꾸준히 달린 과정을 보는 것은 많은 위안이 되었다. 앞서 간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이렇게 계속 달리는게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 런태기가 지나가고 달리기에 대한 좋은 날들이 다시 온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달린 거리가 늘어나 여러 경험이 쌓일수록 달리기가 삶에 주는 의미가 강해져 달리기가 지겹기보다는 계속해서 더 좋아졌다. 그러니 런태기를 반드시 잘 지나가야한다. 달리는 장소가 한 군데라면 당장 달릴 곳들을 여러군데 물색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비슷한 노래들을 들으면서 달렸다면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듣는 것도 좋다. 신발과 운동복을 오래 사용했다면 새롭게 바꿔보자. 달리기는 것 자체는 바꿀 수 없지만 다른 요소들은 변화를 줄 수 있다. 나는 그러지 않았지만 새로운 목표 기록을 세우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꽃에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드는 것 처럼 목표를 달성해 내 것이 되었다고 해서 관심을 게을리 하면 달리기와의 관계는 다시 서먹해진다. 계속해서 불씨를 살리자.
<거의 매일 10km, 5000km를 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