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멈춤, 여행
Photo by Juheeshin
몰디브에 게스트하우스가 있다구요?
그럼요.
여러 섬에 흩어져 300개가 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걸요.
온라인으로 예약이 가능한가요? 혼자 찾아갈 대중교통도 있구요?
물론이죠. 배가 얼마나 많은데요.
어디든 배를 두세 번쯤 갈아타면 금방 도착할 수 있어요!
베를린 ITB에서 만난 몰디브 관광부의 환경 프로젝트 담당관 자무씨는 친절하게도 온갖 화려한 리조트 홍보물 한 구석에서 몰디브 게스트하우스 목록이 모두 담긴 잡지를 챙겨주셨다. 3-4만 원에서 10만 원선까지 몰디브 곳곳에 펼쳐진 330여 개의 게스트하우스가 담겨있는 한 권의 책이었다.
마치 보물지도라도 얻은 양 두 손으로 귀히 받았다.
몰디브를 찾아가는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몰디브가 일생에 한 번쯤이나 가볼까 말까 한 “꿈의 휴양지”가 된 것은 사실 ‘거리’ 때문이 아니라 솔직히 ‘가격’ 때문이었다. 신혼여행 4박 6일에 1인당 5백만 원에서 8백만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리조트는 천국의 풍경과 휴식을 선사할 것을 약속해 주었지만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선 ‘믿음’ 보다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몰디브에 300여 개가 넘는 게스트하우스가, 70여 개의 섬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그것은 여행자들에게 몰디브 자유 여행이라는 새길을 열어주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다^^
몰디브행 비행기는 대한항공 직항도 또 저렴한 중국항공도 대부분 스리랑카를 경유해서 온다. 스리랑카까지 가는 비행기에는 꽉꽉 차 있었건만 몰디브 편은 의외로 텅텅 비어있다. 함께 타고 온 십여 명 남짓한 사람들은 마중 나온 리조트 직원들의 환대와 안내 속에 공항을 빠져나가고 텅 빈 공항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유는 단 하나, 예약해둔 숙소인 빌링길리 섬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무 정보도 없이 도착한 탓이었다. 몰디브를 자유여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아무리 검색을 해도 공항에서 빌링길리 가는 법이나 차표, 차 시간 등의 정보는 찾을 길이 없었다. 관광 대국 몰디브에서, 오지에 도착한 듯 물어 물어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와이프보다 더 중요하다는 와이파이도 없이!
무조건 공항 밖으로 나가고 보자는 심산으로 출입문을 나오니, 공항 바로 앞부터 숨이 막힐 듯 맑고 투명한 바다가 펼쳐졌다. 몰디브의 아름다운 물빛은 꿈의 리조트에나 가야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바다 앞에 서면 그 한없이 맑고 투명한 푸른 물에 닿을 수 있는 곳, 그것이 몰디브였다
그러나 훌루 말레에서 말레로, 다시 빌링길리로 배를 갈아타며 찾아갈 길은 여전히 막막했다. 한참 바다를 보다가 “저... 말레가 어디예요?” 하고 묻자, 공항 직원이 빤히 보이는 건너편 섬을 가리켰다. 부두에서 말레행 페리는 공항버스만큼이나 자주 오가고 있었다.
뱃삯은 천원남짓.. 아직 환전도 못했건만 달러도 척척 받아 준다. 배에서 내려 빌링길리 터미널에 가는 법을 물으니 무조건 택시를 타란다. 가로 1.7킬로, 세로 1킬로미터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수도, 말레에 버스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시아 웬만한 곳에는 있는 뚝뚝도 환경문제 때문에 금하고 있다니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를 탈 밖에... 공항 버거킹 세트메뉴가 15달러였던 것을 생각하면 택시를 타고도 모범택시 요금이 나올 듯 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섬이 작아 걸어도 한 시간이라더니, 택시는 십 분도 안 되어 빌링길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차비는 깔끔하게 미터요금! 우리 돈 삼천 원 정도 나오니 탈. 만. 하. 다! ^^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매표구에서 운항 시간표를 기웃거리니 터미널 직원이 알려준다.
“배는 금방 와요. 5분에 한 대씩 있거든요. 표만 사면 돼요!
뱃삯은 몰디브 돈 3.75 루피, 400원이 안 되는 돈이었다. 마을버스비보다 적은 돈을 내고 대합실에 앉아있으니 정말 5분도 안 되어 배가 들어섰다. 대합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전부 빌링길리에 가는 사람들이었나 보다. 하지만 트렁크를 끌고 빌링길리로 가는 외국인은 드문 지 자꾸 힐긋거린다. 다시 십 분도 안 되어 건너편 섬에 다다르고 다 함께 내린다. 훌루 말레에서 말레만큼이나 가까운 섬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훌루 말레에서 말레까지도 배는 하루 24시간 오분 간격으로 운항되고 있다 한다. 몇 시에 공항에 내리든 몰디브 말레 근처의 섬들에 숙소를 정했다면 가는 길은 걱정이 없다는 얘기였다.
수도 말레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우선 숙소부터 찾고 보자는 심산으로 도착한 빌링길리 섬. 수도 말레 옆의 작은 위성처럼 존재하는 작고 고요한 몰디브 사람들의 섬이었다. 인구 1천5백 명 남짓한 빌링길리에 숙소를 정했다 하니 공항직원도 의아해할 만큼 빌링 길리는 아직 '사람들의 섬'이었다. 버스는커녕 택시도 없는 섬.. 배에서 내린 대부분 사람들은 총총히 걸어서 집을 찾아가고 부두에는 하얀 전기카트 한 대만 왔다 갔다 한다. 빌링길리 인 주소를 들고 망연히 서 있으니 누군가 하얀 전기차를 가리켰다. 막상 타고 보니 전기차는 맞춤형 마을버스였다. 섬 구석구석 집 앞까지 사람들을 내려다 주었다.
“여긴 매연 문제 때문에 아예 택시도 허가가 안나는 섬이에요"
"걷거나 전기차,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섬을 다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채 이십 분이 안 되어 노란 페인트 칠을 한 빌링길리 인 앞에 내려주었다. 빌링길리 인 주인장은 전화 한 통 없이 찾아온 손님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체크인 시간보다 너무 이른 도착에 놀란 듯했지만 친절하게 맞이하며 아침을 챙겨주었다. 조식을 먹는 곳은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레스토랑, 몇 곳의 작은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이 그곳에서 공용으로 조식을 먹는 그런 식당인 듯했다. 함께 여유 있게 식사를 나누며 공항부터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꼬치꼬치 묻는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게스트하우스 오픈한 지 아직 한 달 밖에 안 되긴 했지만...
공항부터 여기까지 혼자 찾아온 사람은 사실.. 당신이 처음이에요 “
“네? 뭐라고요?”
“예약 안내에 있는데 요청하면 몇 시든 우리가 마중을 나가거든요. 공항까지!
이렇게 여행자가 혼자서도 찾아올 수 있다니 놀랍고 반가운 일이었어요"
리조트만 공항 픽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게스트하우스 조차 원하면 공항 픽업을 해 준다니,
역시 관광의 나라 몰디브였다. 낯선 곳에 도착할 때 가장 힘겨운 일이 공항에서부터 숙소까지의 찾아가는 시간이란 걸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 조금 먼 곳의 섬들은 대중교통 시간을 맞추기 어려운 경우 1.2만 원 선에 스피드 보트를 연결해 주어 쉽게 움직이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빌링길리 인에 짐을 풀고 섬을 한 바퀴 도니 곳곳에 게스트하우스, 작은 호텔들이 숨어있다. 어느 길로 가든 바다로 이어지는 길 끝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노는 아이들, 낚시하는 마을 사람들, 저녁밥을 짓느라 분주히 오가는 삶의 풍경으로 가득하다.
서양인 여행자 가족이 해안에서 수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지 아이들과 함께 흠뻑 젖은 채 길을 걷고 있다. 커플로, 또 여자 친구들끼리 다양한 여행자들이 섬사람들 속에 스며있다. 아직 관광객이 낯선 듯 지나가면 바라보지만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무엇이라도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듯 친절히 답해준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과 함께 온 여행자들은 바닷가 모래 해변의 안전한 물가에서 한껏 수영을 즐기고, 바다 깊은 곳을 만나기 원하는 이들은 그저 부두에서 바다로 뛰어들면 아름다운 산호의 정원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와 빌링길리에서도 다이빙이 가능한지 묻자 알리가 웃으며 작은 브로셔를 내민다.
"그건 몰디브 어디서든 가능한 일이에요. 빌링길리에도 다이버 샾이 있어요 다 자격을 갖춘 전문 강사들이고 장비도 빌려주죠. 스노클링부터 리버보드, 다양한 해양 액티비티부터 리조트 방문 프로그램까지 여행자들이 몰디브에서 해보고 싶은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연결 가능했다.
무엇보다 빌링길리는 바로 앞바다에만 뛰어들어도 만타 가오리며 바닷거북을 볼 수 있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해양 생태계가 아름답게 살아있는 섬이었다. 10년 차 레스큐 다이버 주희 씨는 잠수를 10번을 하고도 만나기 어려운 물고기와 산호들을 여기서는 스노클링만 해도 우연히 마주친다며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바다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물기 떼처럼 스쳐가는 관광객들
아직 리조트를 가보지 못한 우리가 몰디브의 리조트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묻자, 알리 씨는
게스트하우스 명함 말고 또 하나의 명함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그의 원래 직업은 리조트 매니저....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한 것은 불과 지난 3월의 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무려 15년간을 리조트에서 일하다가 올해 이 게스트하우스를 가족들과 함께 시작한 것이다.
"아직 리조트 일을 완전히 그만둔 상태는 아니고... 잠시 휴직 중이에요.
얼마 전 다른 리조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거든요.
물론 외국인 매니저들에 비하면 반의 반도 안 되는 급여죠.
하지만 지금 직장보다 나아서 그곳에 근무하는 친구들에게 물어봤더니
다들 몇 달째 월급을 못 받고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제게는 말을 안 해 준 거죠.
비수기엔 종종 그런 일이 있기는 하지만 몇 달씩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어요.
그럼 다들 팁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거죠. 여전히 그런 일들이 끊이지 않아요.
외국인 직원들처럼 노동권이나 법에 의한 보장을 요구할 수 없으니 참을 수밖에요.”
그에게 갑자기 왜 게스트하우스를 열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이유를 묻는 거라면 물론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서죠. 평생 배운 게 관광이잖아요.
게스트하우스는 몰디브 사람들에게도 낯선 기회예요 불과 2010년에 게스트하우스 법이 통과되었거든요. 평범한 사람들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관광객들을 섬에서 만난다는 일은.. 그 전엔 꿈도 못 꾸었던 일이죠. 몰디브는 해마다 10% 이상씩 관광이 성장하고 있어요. 하지만 리조트에만 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저 지나가는 물고기 떼일 뿐이죠"
지나가는 물고기가 떼... 그의 말에 담겨있는 다하지 못한 말들을 헤아리며 다시 마을을 향해 길을 나섰다.
우리의 여행이 지나가는 물고기 떼가 되지 않도록, 마을 식당을 찾아 오늘 잡은 생선으로 만들었을 바닷가 마을의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지을 시간인지라 남자들만 가득한 식당, 낯선 여행자 둘이 저녁을 먹고 짜이를 마시는 모습이 어색한지 마을 사람들은 싱긋 웃으며 고요히 지켜본다. 따갑게 꽂히는 무례한 시선이 아니라 저녁 불빛처럼 조용한 환대가 담긴 따뜻한 눈빛이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한 바닷가에 사람들이 수런수런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빛나는 저녁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동네 청소년들은 저희끼리 낚싯줄을 드리우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나무에 길게 매어둔 해먹에 누워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바닷바람에 손녀와 그네를 탄다. 누군가 잡은 물고기를 가지고 종종걸음으로 저녁을 지으러 가는 엄마들 속을 함께 걷는다.
맑은 어둠이 바다를 덮는 것을 새로운 일상인 듯 함께 지켜본 저녁, 히잡을 쓴 여인들처럼, 우리도 검은 어둠을 머리에 쓰고 고요히 골목을 되밟아 돌아와 진짜 몰디브의 밤에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