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기록이 한 곳에 자리를 잡기까지
습관이 어디 가겠는가. Notion을 열고 기록한다고 했을 때, 나는 여전히 메모앱에 기록하던 것처럼 썼다.
빈 화면이 나오자마자 주르륵 내려적기 시작했다. 아이디어 노트를 기록할 때는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문제는 매일 기록했던 할 일(To-do List)이었다. 프랭클린 플래너 시절부터 해오던 습관대로, 날짜를 적고 그 아래에 오늘의 할 일을 나열했다. Notion에 체크박스 리스트가 쉽게 만들어짐을 알고 나서 사용했던 플래너처럼 거침없이 적어갔다. 다음 날이 오면 또 날짜를 적고, 또 할 일을 나열했다.
'한 달, 두 달. 이걸 1년 동안 계속하면 예전 기록은 어떻게 확인하지? 끝없이 스크롤을 내려야 하나?'
문득 들었던 생각이 며칠 지나자 반영되고 있었다. 불과 며 사이에 에버노트에서 느꼈던 그 답답함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고. 이 도구도 결국 똑같은 건가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워크스페이스라는 개념도, 페이지라는 개념도 없이 사용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왼쪽 사이드바에서 + 버튼을 눌러 새 페이지를 만들어 적고, 새로운 카테고리의 기록은 다시 + 버튼을 눌러 기록했다. 난 그게 '페이지'라는 개념인 줄도 몰랐다. 그냥 새 메모를 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글을 쓰는 도중에 슬래시(/) 키를 눌렀다. 뭔가 못 보던 메뉴가 쫙 펼쳐졌다. 그중에 '페이지'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눌러봤다. 그랬더니 지금 쓰고 있는 메모장 안에 '새 페이지'라는 메모장이 하나 더 생겼다. 몇 번 반복을 해 봤다. 페이지 안에 새로운 페이지를 계속해서 만들 수가 있었다. 페이지 안에 페이지라니.. 언젠가 기념품 샵을 파는 곳에서 보았던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가 생각났다. Notion의 페이지가 딱 그랬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트료시카는 크기가 점점 작아지지만, Notion의 페이지는 크기의 변화 없이 한 페이지 안에 얼마든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넣을 수 있었다.
'어, 날짜별로 페이지를 만들어서 넣으면 되겠는데?'
'업무'라는 페이지 안에, 프로젝트별 페이지를 넣고, 그 안에 또 날짜별 기록을 넣으면, 지금까지 하나의 화면에 끝없이 쌓아 내리던 기록을, 층층이 정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뭔가 정리가 되어갔다. 프로젝트별 업무 노트, 회의록, 아이디어 페이지가 생기고, 업무 노트에는 Daily Task 페이지가 생겨갔다. 프랭클린 플래너 시절부터 해오던 방식이었다. 카테고리별로 나누고, 주제별로 묶는 것. 달라진 건 그 구조를 종이가 아니라 화면 안에서, 무한히 확장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버노트와 스마트폰 메모장, 네이버 메모, 구글 Task에 흩어져 있던 기록들을 하나씩 Notion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지난 메모들을 옮기면서, 흩어져 있던 기록이 한 곳에 자리를 잡아갔다.
여러 앱을 오가며 뒤지던 그 시간이 사라졌다. 한 곳에서 열고, 한 곳에서 찾으면 됐다. 기존 노트앱에서는 노트를 만들고, 노트북으로 묶는 게 전부였다. 내 기록 방식에 도구를 맞추는 게 아니라, 도구의 형태에 나를 맞춰야 했다. 노트가 수백 개를 넘어가면 태그를 달아봐도 결국 같은 문제가 반복됐다. Notion은 그 관계를 뒤집었다. 기록을 넣을 수 있는 서랍장을 내가 만드는 도구였다. 칸을 몇 개로 할지, 어떤 기준으로 나눌지, 깊이를 어디까지 가져갈지. 정답이 없었다. 아니, 정답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 도구의 방식이었다.
지금은 모두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지만, 처음에 나를 사로잡은 건 데이터베이스나 자동화 같은 기능이 아니었다. 페이지 안에 페이지를 넣고, 내 방식대로 구조를 잡는 것.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틀에 기록을 채워 넣는 게 아니라, 틀 자체를 내가 설계한다는 것. 기록하는 사람에게, 이 차이는 작지 않았다.
10년 넘게 이 앱 저 앱을 떠돌던 기록이, 처음으로 한 곳에 모였다. 그제야 기록이 다시 쓸모 있어졌다. 그리고 난 '개인'이라는 페이지를 하나 만들었다. 일상의 기록, 취미 생활, 잊지 말아야 할 메모들. 업무만 정리한 게 아니라, 내 생활 전체를 이 안에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기록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록을 한 곳에 모은 뒤, 나의 정리하는 방식은 또 한 번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