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플래너에서 Notion까지, 20년의 기록 여정
2005년, 프랭클린 플래너(Franklin Planner)를 처음 손에 쥐었다. 폼 나는 가죽커버에 파카(Parker)펜이 꼽혀있는 플래너를 선물로 받고, 물놀이하는 어린애마냥 너무 신나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시작된 듯 싶다. 그리고 나는 메모광이 되었다. 그래. 기록충은 벌레니까. 그래도 미친놈(狂)은 사람이니..
To-do를 우선순위별로 정리하고, 그날의 Task를 하나씩 지워가는 감각. Idea Note에 떠오르는 생각을 갈겨 적으며 사고를 확장하는 습관. 그렇게 연차가 쌓이는 만큼, 책상 한켠에는 두꺼운 플래너들이 해마다 한 권씩 늘어갔다. 무언가를 적어야 비로소 생각이 정리되고, 적어야 비로소 실행이 되는 사람. 나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렇게 10년을 썼다.
2009년, 아이폰이 손에 들어왔다. 스마트폰의 메모장, 그리고 에버노트라는 앱. 내 기록하는 습관은 언제 어디서든 기록할 수 있는 손 안에 기계로 자연스레 옮겨갔다. 들고 다니기 힘든 프랭클린 플래너는 점점 나 대신 책상을 지키는 날들이 많아졌다. 굳이 펜을 꺼내지 않아도,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면 충분했으니까. 에버노트에 업무 노트와 아이디어를 쌓고, 빨리 확인해야 하는 것들은 스마트폰 기본 메모장에 적는 습관이 생겨났다. 10년간 함께했던 플래너는 그렇게 조용히 멀어졌다.
문제는 그 이후, 시간이 꽤 흐르면서 나타났다.
에버노트에 쌓인 기록의 양이 많아지자 앱이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검색을 해도 원하는 메모를 바로 찾기가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빠르게 적어야 할 것들은 여전히 스마트폰 메모장에 따로 적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부족함을 채우지 못해 네이버 메모도 쓰고, 구글 Task도 쓰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냥 필요할 때마다 손에 잡히는 앱에 적었을 뿐인데, 기록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기록의 양이 늘어난 만큼, 나의 기억도 분산되었다. 분명 어딘가에 적어뒀는데, 그게 에버노트인지, 스마트폰 메모장인지, 네이버 메모인지 알 수가 없다. 여러 앱을 오가며 뒤적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는 일이 반복됐다. 수 년간을 성실하게 기록해온 사람이, 기록 때문에 막히는 아이러니. 기록이 더 이상 무의미할 정도로, 양만 많아지고 있었다.
2021년, 산을 좋아하는 친한 형이 회사를 뛰쳐 나와 칭업을 하겠다며 본인이 준비한 사업 기획안을 보여줬다. 새로운 노트앱이었다. 그게 Notion이었다.
"너도 얼리어답터잖아. 이거 써봐 엄청 좋아. 난 개발자랑 이걸로 소통하고 일한다."
노트를 공유해서 협업한다? 헤어지고 나서 바로 가입해서 잠깐 훑어봤다. '에버노트랑 뭐가 다르지?' 메모를 적고, 정리하고, 저장하는 앱. 이미 내 폰에는 그런 앱들이 너무 많았다. 이걸 굳이 또 써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더 이상 흩어진 기록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에 대한 참을성이 모두 소진 될 무렵의 주말이었다. 그때 문득 형이 보여줬던 그 앱이 떠올랐다. '여기에 한 번 정리를 해볼까?' 그렇게 Notion이 시작됐다.
솔직히 처음에는 더 정리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난 그냥 기존처럼 메모장으로 썼기 때문이다. 열자마자 빈 화면에 주르륵 적기 시작했는데, Notion은 그런 도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존 메모장처럼 생각 없이 적어 내려가면 안되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지우고 다시 쓰는 것을 반복하다가 '페이지'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메모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 안에 페이지를 만들고, 기록을 아카이브로 저장할 수 있다는 것.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을 때 이런 느낌 아니었을까? 그 순간부터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흩어진 기록들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