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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리아 Aug 03. 2021

슬픔을 함께 하는 슬픔

영월, 청령포를 다녀와서

며칠째 계속되는 폭염을 질책하기라도 하듯 아침부터 구름이 의기양양하게 태양을 가린다.

“산책하기 좋은 날이네.”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밖에 비오니?”라고 하신다. 

어? 뭐야, 진짜 비 오네. 오랜만에 그늘도 지고 해서 바닷가 산책을 가려고 했더니, 산책하기는 글렀네.

“네, 비가 오네요. 밥 먹고 산책 나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라고 말하고 계란찜과 불고기 볶음, 김치 볶음을 세팅하고 아침 식사를 했다. 어머님이 오랜만에 집에 오셔서 아침 식단이 풍성하다. 우리 식구끼리 먹었으면 소시지 볶음 정도였을텐데, 어머니 덕분에 불고기, 김치볶음, 계란찜까지 든든하게 먹었다.

어? 그런데, 식사를 마치자 비도 그쳤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는 그쳤지만 심술꾸러기처럼 먹구름이 들락날락한다. 심드렁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니 남편이,

“전주 갔다 올까?” 한다. 시흥에서 전주는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운전하고 차 타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식구의 당일치기 단골 여행지이다.

“얼마나 걸려?”

“2시간 20분?”

“그래? 그럼, 청령포는?”

“청령포? 어디에 있어?”

“영월, 단종 첫 번째 유배지!!”

“어디 보자, 청령포, 청령포.... 2시간.... 1.... 10분”

“그래? 그럼, 청령포 가자.”

“아들아, 청령포 가자. 어서 씻고 외출 준비해라.”라는 소리에 우리 아들 황당하다는 듯이,

“갑자기?”라고 한다.

“어, 싫어? 그럼, 넌 집에 있던가.” 

난 용감한 엄마다. 중2 아들 놀리는 재미로 사니까. 

“고건 아니지. 알았어. 챙길게.” 

왜냐하면 갱년기 엄마에게 이렇게 맞받아치는 용감한 중2 아들이니까. 

   

이렇게 해서 5인 가족 청령포 당일치기 여행이 시작되었다. 다른 점이라면 코로나19 4단계 시행 중이고, 강원도도 3단계 시행 중이라 5인 가족이 들어가서 식사를 할 수 없다는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도시락을 급하게 준비했다.

냉장고에 있는 잼을 작은 용기에 조금씩 담고, 냉동고에 있는 식빵을 구워서 일회용 용기에 먹기 좋게 자르고, 토마토를 꿀에 재워 1인용 용기에 나눠 담고, 초코파이, 물, 커피, 음료수를 신속하게 준비했다. 준비하는 과정이 나름 재미있었다.   

자, 이제 출발!!!     

1학기 내내 공문과 수업 준비, 부서 업무, 의무연수에 진이 빠지도록 바빠서 듣고 싶은 인문학 연수를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새롭게 신청한 연수가 있는데, 우리나라 철도를 타고 각 지역의 역사 유적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소개하는 연수이다.

그 첫 번째 지역이 강원도 영월, 청령포!

연수를 들으면서 청령포에 있는 ‘관음송’을 꼭 보고 싶어 졌다.

 


단종은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세종은 이때 "원손(元孫) 이홍위는 천자(天資)가 숙성하고 품성(稟性)이 영특하고 밝은데, 지금 나이가 스승에게 나갈 만큼 되었으므로 너를 명해 왕세손을 삼는다."라고 했다.

1450년(문종 즉위)에는 문종의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문종 2) 5월에 문종이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 불과 12세였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란(靖亂)으로 유명무실한 왕이 되었다.

...

1455년(단종 3) 윤6월에 단종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해 주려고 한다."라는 말과 함께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의 집에 연금 상태로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457년(세조 3) 6월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다. 

...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했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Daum백과, 조선국왕전] 



12세에 왕위에 올라서 3년 만에 즉위에서 물러나고 유배 생활을 하다가 17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잔혹한 세월을 보낸 것이 12세에서 17세까지이다.      

12세에서 17세!!     

17세!!

15세 우리 아들이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고, 뱃속에서부터 왕이 되도록 교육을 받았고, 왕 이외의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 17세 어린 왕이 자신의 숙부에게 배신당하고 왕위를 찬탈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상왕의 자리에서 ‘군’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으며 강원도 굽이굽이 산골, 작은 나룻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작고 초라한 언덕 크기의 소나무 숲 한가운데, 궁궐 대신 초라한 집으로 유배당했을 때의 상실감이 어땠을까?   

자신을 복위시키기 위해 찾아오는 위정자들로 인해 위안을 받고, 잠시나마 기대를 하고, 반면 핏빛 서린 숙부의 눈이 생각나 두려움에 떨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양에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나고 모두의 안위가 걱정되고 소나무 숲 깊은 어둠에 혼자 남아 있는 그 처절함에 매일 밤 몸서리를 쳤으리라. 

단종어소, 소실되어 영조 때 복원됨

저 작은 처소를 빙 둘러서 소나무가 서 있다. 그리고, 단종어소의 돌담을 왼쪽으로 돌아 나무 데크를 살짝 따라 내려가면 소나무 숲 가운데에 ‘관음송’이 그 애절하고 고단한 역사를 지탱하며 서 있다. 단종의 처절한 쓸쓸함과 고독함, 외로움, 두려움을 모두 보고 들었다 하여 ‘관음송’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관음송

 지금은 소나무 숲 가운데 단종어소가 있는데, 지금의 모습은 영조 때 복원하면서 만들어진 것이고, 나무 데크도 관광지로 조성하면서 만들어졌으니 아마 단종이 유배 생활했던 시절에는 삭막하기도 했을 것이고 훨씬 쓸쓸했을 것이다.      

나는 단종어소보다 이 관음송을 더 보고 싶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모두 듣고 보고 마음에 담아 ‘너의 아픔을 내가 알아’라고 매일 밤 단종을 위로하였으리라.




아주버님이 마흔의 나이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아들을 잃은 우리 어머님은 매일 우셨다. 괜찮아지셨다가도 또 우셨다. 

그게 괜찮아졌다고 하지만 괜찮아지지가 않았을 테지.

내가 결혼하고 1년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니까, 아직은 결혼이라는 제도로 만난 낯선 어머님의 슬픔이 나는 너무 벅찼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이야기 끝에 토해내는 것은 결국 아들을 잃은 슬픔이었고, 혼자 남은 큰며느리 걱정이었고, 지금까지 지내온 날들의 아픔이었다. 

 

아, 담을 수가 없다. 이 슬픔은 정말 내가 담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남편과 참 많이 싸웠다. 

결국, 나는 

“당신 어머니야. 우리 엄마 아니고, 당신 어머니라구. 일찍 와서 이야기도 들어드리고 해.”

라고까지 울분을 토해냈다. 

지금 생각하니 우리 남편은 아버지 같은 형을 잃었는데 그럴 경황이 있었을까 싶다. 

그땐 나도 내 상처만 생각했다. 

슬픔에 잠겨 모두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내린 결정은 '거리두기'였다.

그 당시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셨지만 어머니 집이 우리 집 바로 옆에 있었다.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어머니와 한 집에서 그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함께 살자고 했는데, ‘함께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려웠다, 녹록지 않았다’ 등으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 하지 않으련다.     

그 슬픔은 참으로 깊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해서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두기로 했다. 

서로에게 자신만의 작은 공간을 만들어 자기만의 숨을 쉬기 위해서.   

너무 조심스러웠지만 어머니께 먼저 말씀드렸다.     

“어머니, 우리 집을 따로 생활하는 건 어떨까요? 낮 동안에는 우리 집에서 생활해도 좋고, 어머니 오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오셔도 되니까요. 잠은 각자 집에서 자는 것으로 해요.”

“.....”

“.....”

“그러자, 나도 그러는 편이 마음이 좋겠다”

그러고, 어머니와 우리의 깊은 슬픔의 동거 시대가 막을 내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 당시 우리는 서로에게 ‘관음송’이 될 수 없었으니까. 


지금도 어머니의 모든 아픔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리적인 거리, 심리적인 거리를 두고부터는 어머니의 아픔을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단종어소에 가보면 단종어소와 관음송과의 거리가 조금 된다. 모퉁이만 돌면 서로 보이는 정도의 거리이다. 이 조금의 거리가 어느 시각에서는 좁히지 못하는 격차로 보이겠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서로를 향한 마음의 여유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다른 이의 아픔을 함께 하고 있는 모두에게 어느 비오는 여름 날, 누군가의 슬픔을 사명처럼 들어주고 있는 노송의 이야기를 전하며 짧은 청령포 여행기를 마치고자 한다.

 

여행tip. 

1. 청령포는 영월군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5시까지 가야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다.

2. 청령포 근처에 영월역은 한국에 현존하는 유일한 한옥역사라고 하니 가볼만한 곳이다.

3. 여행 날짜가 5일이라면 영월 5일장에 함께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4. 숙종 때 복원되어 세워진 ‘장릉(단종묘)’에 들르고

5. 동강, 서강의 한반도 지형을 나룻배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이다. +

단종어소에서 나와 작은 배를 타고 작은 강을 건너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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