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친구
중학교 3학년 아들, 나의 아들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친구는 안 만나는지, 학교에서는 누구랑 이야기를 하고, 누구하고 마음이 제일 맞는지 물어보면…
‘없어’라고 합니다. 엄마의 마음과 특히 교사 엄마의 마음 심연에서 걱정이 마구마구 솟구쳐 오릅니다. 친구가 없어?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안 해? 걱정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어? 한 명도? 정말 숨이 차 오를 정도로 생각들이 마구 쏟아지고 아이에게 막… 물어보고 싶은데 참게 됩니다. 정말 중학교에 입학시키고 다른 엄마들은 아이의 학업을 걱정할 때 초등학교 입학시키고 걱정하게 된다는 아이의 친구관계를 너무 늦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없다 = 왕따
라는 공식이 머릿속에서 자꾸 성립이 되어 어느 날은 밥맛도 없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아이가 괜찮다고 하는데 억지로 엄마 친구를 만들어서 그 아이들과 친구를 삼아줄 수도 없고, 그저 우리 아들이 자신만의 사회구조에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은 여자 친구를 사귀고 조금 후에 헤어지고, 또 어느 날은 마인크래프트에서 만난 영어권 아이와 채팅을 하고, 또 어느 날은 학교 친구들과 프로젝트 수업을 하기 위해 만나러 가기도 하고, 언젠가는 그나마 하나 있던 친구와 절교하기도 하고, 여자 친구들과 스터디 모임도 하고, 동네 꼬마들과 야구를 하기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 교우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아들의 교우관계 과정의 페이스를 인정하고 지켜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친구라는 것은 세상의 선입견에 둘러싸인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들의 친구 문제를 걱정하는 일은 잠시 멈추기로 했습니다.
‘학교 친구가 없다=왕따’라는 공식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위험한 생각, 편협한 생각임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마음 조각을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친구라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쉽사리 친구를 사귀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자전거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포뮬러 1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레고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엄마가, 동생이, 아빠가, 선생님이 친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학교 친구는 학교 친구다… 라는 기본 전제를 깔아보려고 합니다.
친구 앞에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우리 아들에게는 친구가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친구의 뜻을 찾아보니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네이버 사전)’이라고 합니다.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가장 먼저는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당연히 친구가 생겨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친구가 생기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걱정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이가 낯선 환경인 학교라는 곳에 발을 내딛을 때 얼마나 불안했을까, 정말 힘들었겠지라고 공감하며 속에 있는 마음을 먼저 보듬어 주지 못했던 것들이 참으로 미안합니다.
마치 아이의 모든 것을 ‘친구’에게 떠넘기기를 하기라고 할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가장 친한 ‘친구’로서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어제는 아들과 테니스를 시작하고 실내에서 신을 운동화를 사러 **아울렛에 갔습니다. 물론 가까이에도 매장은 있지만 드라이브도 할 겸 차를 몰고 조금 멀리 나가보고자 했습니다.
“신발 사러 갈까?”
“어~”
“**으로 갈까? 조금 멀긴 한데 드라이브 겸~”
“좋아”
아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 체육 선생님의 이야기, 자신을 둘러싼 somethtings를 툭툭~이야기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친구지?”라고 대뜸 물어보았더니
“뭐, 어떤 의미에서는 친구지..”라고 말해주는데 갑자기 감격스러웠습니다.
내가 그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단어들의 의미를 내 생각의 프레임을 걷어내고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