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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리아 Mar 26. 2022

비 갠 후 산책

다시 비

4시 30분 눈이 떠졌다. 보통은 너무 이른데? 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웬일인지 오늘은 그냥 몸이 일어났다.

굳이 평소의 습관처럼 침대에 몸을 누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조용한 거실로 나와 책을 들었다. 얼마 전에 갑자기 푹 빠진 [세계사 탐정 코난] 시리즈 중 아틀란디스대륙의 진실을 읽고, 진도가 나가지 않던 [학습하는 조직]을 읽었다. 모두가 잠이 들어있는 어둠이 이렇게 평온한 시간이구나를 깨닫는 순간이다. 이게 이렇게 집중이 되는 책이었어?라고 조금 놀라웠다. 그렇게 책을 읽다가 몸을 살짝 움직여 시계를 보니 6시 59분? 진짜? 얼마 지나지 않았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아침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또 한 번 놀랬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산책을 가야겠다 싶어서 어제의 비가 여전히 오고 있을까.. 창을 내다보니 그친 것 같다.

서둘러 운동복을 갈아입고 집 근처 자그마한 산에 오르려고 하니, 비가 온 뒤 산은 조심해 볼까, 하는 생각에 공원으로 발을 돌렸다.

토요일 7시의 길에는 사람이 없다. 없구나.. 정말.. 모두 일주일의 피로를 풀고 있겠지?

천천히 길을 걸으면서 옆으로 지나가는 차 소리, 바람소리, 바람이 내게 와서 부딪히는 소리, 착착착.. 내 걸음 소리, 어제 내린 비로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에 차락~하고 닿는 발바닥 소리, 아침 산책에 신이 나서 나오는 내 입의 흥얼거림..,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이 도시에 너희도 살고 있었구나, 생각하며 오랜만에 여유로운 산책을 해본다.


토… 톡…토독… 투… 툭…


어????


비????


아차, 비가 그친 게 아니었구나. 사실, 누가 봐도 하늘 가득 물기를 머물고 있었고 언제든 비가 내려도 이상할 것 없는 날에 우산 없이 나온 사람이 비를 맞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비를 맞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비는 비의 역할을 하려고 내리는 것이니, 자연스러운 것이니 너는 내려라.

나는 산책을 나왔으니, [비에도 지지 않고] 나의 산책을 하겠다.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의 그림책이다. 참 의미 있는 그림책이라 한 번쯤은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그림책이다.)


전에는 길을 가다가 무방비 상태로 ‘비를 맞는다’라는 것은 생활 속의 작은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비가 참 반갑다. 자연현상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며 이것저것 생각해본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위로일 것이다. 우산 없이 비 피할 곳을 찾는 이에게는 급작스럽게 만난 봉변일 것이다.

오늘 나에게 비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오늘 나에게 비는 깨달음이다.

비를 맞으면서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나무 아래 잠시 서보았다.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얼기설기 난 소나무 잎이 비를 가려주네? 정말 비를 덜 맞네? 신기하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내가 무슨 힘이 있어’, ‘나 하나 바뀐다고 뭐가 되겠어?’라며 방관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이제 나를 조금씩 바꿔볼까 한다. 모른 척하지 않기, 혼자 하지 않기, 부담 떠넘기지 않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기… 숨 쉬듯이 당연하게 조금씩 움직여볼까 한다.


비를 맞아보니 차갑다. 길도 미끄럽고 걷는 걸음도 조심스러워진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한적하니 참 좋다. 쉬임 없이 재잘대는 아이들의 소리가 사랑스럽다가도 모든 것이 멈춘 듯 조용했으면 하는 순간이 있는데, 지금이 그런 것 같다.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보석을 발견한 것 같다.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지만 모두가 쓰지 않는 시간 보석. 그리고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발길이 뜸한 비 오는 거리라는 보물.


비 오는 풍경을 보려면 비를 맞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날이다.

오늘 나의 세계는 1미리 정도 넓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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