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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키너 May 07. 2018

만둣국과 종로의 추억

조리학과 신교수의 식탁 일기



집사람과 함께 오랜만에 나가는 종로 나들이입니다.

종로 하면 관철동이 떠오르고, 종로서적 앞에서 설레며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기억을 추억한다면 당신은 저의 친구이거나 선배님이실 듯합니다. 보신각의 종소리가 있어 종이 있는 거리라는 뜻의 '종로'라는 이름 붙여진 그곳, 일명' X-세대'로 불리던 제 나이 또래가 참으로 좋아하던 종로입니다.

종로서적도 없어지고, 피카디리극장과 단성사는 영화관이 아닌 귀금속 도매 상가로 변했으며 관철동은 지금의 홍대와 연남동, 가로수길에 밀려 종로는 더 이상 제가 알던  곳이 아닌 듯 보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인사동에는 사동 면옥(만두집)과 경인미술관(인사동의 오랜 미술관 겸 찻집), 지대방(인사동 터주대감 찻집)등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 시절의 우리를 추억케 해줍니다.

삼청동을 들러 돌아 나오는 길에 안국동 '깡통 만두'에 들렀다가, 대기번호가 너무 길어 인사동으로 내려옵니다.  평일 낮 인근 회사원들의 점심시간이 아니면 그리 심하게 붐비는 식당은 아니었는데, 수요 미식회에 맛집으로 소개된 이후의 변화에 미디어의 힘을 새삼 느낍니다.

늦은 오후에 오면 고즈넉하고 한가한 식당이라 참 좋아했는데,  서운하기도 하고... 왠지 다음에는 찾지 않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앞섭니다. 아끼는 정겨운 식당들이 유명세를 타니 좋기도 하지만 이제 오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 섭섭하기도 합니다. 하긴 요즘 서울 사대문 안에 '노포'라고 칭해지는 웬만한 식당들은 맛집 프로그램, 미슐랭 가이드와 자갓 서베이, 블루리본 서베이  등의 레스토랑 평가지들에 모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늘 가깝고 친근했던 오래된 식당들이 아쉽게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인사동 개성 만두집 '궁'에 겨우 한자리 차지한 후  만둣국을 청하고, 집사람과 함께 대학 시절의 추억과 만두 이야기를 합니다.  


《데 레 코퀴아리나》로 전체 제목이 지어졌으며 아피키우스라는 이름은 음식에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서양에 피자가 있다면, 동양에는 만두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특히 동아시아지역에서는 만두가 거의 모든 나라의 식탁에 빠지지 않는 음식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대부분 아시아 지역에서  만두소를 감싼 만두피 형태의 '만두'란  음식문화가 존재합니다. 서양 역시 동양과 다르지 않아 고기와 채소를 밀가루로 감싸는 요리는 '미트파이'부터 이태리 만두라는 '라비올리', 남미의 '앰파나다'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연구를 하는 프랑스 사학자 장 보테르(Jean Botero)는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의 요리책에 전해지는  만두의 원형인 ‘푀겔헨’이라는 음식이 만두의 원형일 것이라 말합니다.   ‘밀가루를 반죽한 피 위에 다진 고기를 올린 다음 다시 피로 덮는다’고 요리책에 소개돼 있는데 만두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메소포타미아 기원설을 주장하는 서양 중심의 학자들은 ‘푀겔헨’이 유럽으로 전파되어 라비올리가 되었고,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만두가 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상당히 서양중심주의적인 생각으로 아시안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자아냅니다. 또한 로마시대, 인류 최초 조리서라고 하는  Apicius cookbook(4세기 말~ 5세기)에도 만두 형식의 요리가 소개되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중국 주방에서 화덕과 대나무 짬기에 만두를 찌는 장면, 오른쪽에 밀가루 반죽은 만두가게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두의 역사에서 최고 지존 자리를 차지하는 중국 만두의 역사에는 만두에 관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 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중국의 만두를 우리가 아는 3가지로 분류해보면 포자만두(빠오즈)와 교자만두(쟈오즈), 만두(만터우)가 있습니다.

밀을 제분하고 반죽하는 '만두피'는 만두의 역사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단서 입니다.

첫 번째, 포자만두는 발효된 만두피에 소를 넣어서 만들어 찌는 스타일의 만두입니다.

두 번째, 교자만두는 발효되지 않는 만두피에 소를 넣어 초승달 모양으로 빚어내는 만두로,  삶거나 지져먹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많이 먹는 만두의 종류입니다.

세 번째, 중국인들이 칭하는 만두(만터우)는 안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화권(꽃빵)같이 생긴, 찜기에 찐 빵을 이야기합니다.

(중국에서 빠오즈나 쟈오즈가 아닌 만터우를 주문하면 '소 없는 공갈 만두'가 나오니 포자나 교자를 주문해야 합니다.)

  

중국 만두의 역사는 두 가지 기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삼국지에 나오는 중국 최고의 참모인 제갈공명이 남만(지금의 미얀마 지역)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강의 풍랑이 거세어 뱃길이 험해지자 밀가루 반죽에 양과 돼지고기를 넣어 사람의 머리처럼 만두를 빚어  제사를 지내고 무사히 강을 건너 돌아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두의 유래라고 소개된 이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삼국지는 '서기 184년 황건의 난부터 서기 280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명나라 때의 소설'이다 보니 만두에 관한 정확한 고증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점이 있으나, 동양권의 만두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중국 무협 소설과 영화에서 최고의 의사 '화타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중국의 4대 의성 장중경(張仲景, 출생 150~154년 사이, 사망 215~219년) 선생이 만두의 유래라는 설도 있습니다.

장중경이 벼슬을 마치고 낙향하여 고향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귀에 동상이 걸려 고통받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에 그는 제자들과 함께 마을에 천막을 치고, 가마솥에 양고기와 산초를 넣은 귀 모양의 만두를 빚어 한기를 몰아내는 약재와 함께 '거한교이탕(去寒嬌耳湯)'을 끓여 냅니다. 천막에서 추위를 피하면서 따뜻하고 영양 많은 만두를 먹은 백성들이 동상이 다 낳았다고 전해 집니다. 이에 동네 사람들이 피로 싼 이 음식의 모양이 자그마하고 예쁜 귀처럼 생겼다 하여 ‘쟈오얼(嬌耳)’이라 부르다가 후에는 ‘쟈오얼(餃耳)’, ‘쟈오즈’로 바뀌었고 이것이 오늘날 교자 형태의 만두를 이야기한다고 전해지는 설입니다.


만두의 유래에 나오는 제갈공명(좌)과 장준경(우)


우리나라 만두의 역사는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보다 영화배우 조인성 송지효의 영화 '쌍화점'으로 유명한 '쌍화'가 만두를 뜻합니다. 밀가루가 귀하디 귀한 고려시대에 원나라에서 전파된 상화(霜花)는 밀가루가 서리처럼 희다고 하여 서리 상(霜), 상화(霜花), 서리꽃으로 불렸다고 전해집니다. 상화점은 고려 시대에 은밀한 불륜한 장소로 변질되고, 상화 또한 둘이 붙어있다는 뜻의 쌍화(雙花)로 불리게 됩니다. 고려 속요로 내려오는 쌍화점은 고려시대의 문란한 성풍속을 이야기하는 반증으로 고려시대에는 아마 '라면 먹고 갈래?'가 아닌 '만두 먹고 갈래?'가 유행어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 만두는 "영접 도감 의궤(迎接都監)"(1643년)에 처음 소개됩니다.  중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고 하며, 그 후에는 궁중의 잔치에도 종종 차렸다고 전해집니다.

쌀이 귀한 개성 이북 지방에는 메밀로 만든 만두피를 이용하여 명절과 축일에 교자 형태의 만두를 만들어 먹었으며, 남쪽 지방은 풍부한 쌀로 가래떡으로 동그란 모양의 엽전 느낌으로 떡을 썰어 떡국을 끓여 먹으며 부를 기원하였습니다.


조선 중기 가장 오래된 한글로 기록된 요리책 '음식 디미방'에  메밀가루로 만든 만두피에 무나물과 꿩고기를 소로 하여 만든 만두가 언급되는 걸 보면 조선시대부터는 만두를 많이 먹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실향민들이 남쪽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특히 서울 지역은 개성 이북 음식과 남부 음식이 만나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냅니다. 실향민들의 영향으로 만두는 냉면과 더불어 196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차례상과 명절 음식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어릴 적 명절 풍경은 형수와 누나들은 차례상을 차리면 남자들은 여자들이 하기 힘든 밤 까기와 만두피를 만들어 거들던 기억이 납니다. 형들이 홍두깨로 만두피를 밀면 저는 동그란 밥그릇으로 만두피를 잘라 성형하고, 형수와 누나들이 만두를 만들었습니다. 만두 만들기에서  만두소를 만드는 일만큼 만두피를 만드는 것이 힘든 일인지라 명절 이외에는 먹었던 기억이 없습니다.


1970년대 후반 동네 구멍가게로부터 진화된  '슈퍼마켓'이라는 새로운 물류의 혁신 시대가 도래합니다. 재래시장과 구멍가게에 드라이아이스로 보관하던 '하드 보관통'이 전기냉장고로 바뀌는 일대 혁신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명절 때인가 처음 심부름한  냉동 만두피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오! 이런 신기한! 이렇게 얇은 만두피를 만들 수 있다니!'  


너무나도 얇은 만두피와 한 장씩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만두피들이 떨어지고, 얇디얇은 만두피가  손으로 만든 두꺼운 만두피보다 월등히 맛있는 만두를 만들어 주는 만두피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시판용 만두피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집에서 만두를 빚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명절은 물론이고, 손님이 오시거나, 심지어 복날에도 만두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손만두는 지금도 제게는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급속도로 빨라져 대학 때부터 냉동만두가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집에서 만두를 빚는 풍경은 이제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되었습니다. 차례상에 만두까지 직접 빚는 일은 힘에 부치는 과정이 되면서 요즘 집 만두, 손만두가 귀합니다.

요즘 대형마트를 가면 가장자리는 신선식품군을, 중앙에는 공산품과 가공식품군, 그리고 또 한축으로 냉동 식품군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식품산업게 근무하시는 분들이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면 마트 가장자리에서 신선 식품만 구매하고 계산하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마트 중앙을 채우는 냉동고에는 모든 식품회사들이 각 회사의 최고급 기술력과 좋은 재료들을 썼다고 광고하며 HMR(가정용 대체식품)용 냉동 만두들을 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들 좋은 제품이라고 생각되지만, 예전에 밀가루를 손으로 반죽하여 홍두깨로 핀 두툼한 만두피로 직접 만든 집만두가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2018년 5월의 종로 익선동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종로 서적은 없어졌지만, 요즘 종로에 북촌과 서촌이 새로운 명소로 부활합니다. 1980년대 경복궁과 청와대가 있던 경비가 삼엄한 삼청동과 안국동이 2000년대 들어 새로운 거리로 태어납니다. 종로에는 새로운 거리가 생겨나고, 다시 젊음과 에너지가 모이기 시작합니다. 인사동에서 만둣국을 먹고 요즘 인기 있다는 익선동을 걸어 봅니다.

구한말 새로운 도시형 뉴타운으로 지어진 한옥거리였다가, 박정희 정권 시절 '오진암'이라는 요정이 있어 기생관광의 일번지라는 오명과 사창도 성행했다는 비좁은 골목길, 70~80년대 발전의 시대에도 철저히 외면받던 종로의 익선동이 그 비좁은 골목길이 새롭게 거듭났습니다. 전통과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운치 있는 식당과 카페들이 입점하고 있으니  세상은 참 요지경이고,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을 실감하는 밤입니다. 비좁은 골목을 걸으며 차 한잔 마실 곳을 찾아보다가,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듯한 한옥 카페에 들어갑니다.  요즘 유행하는 북유럽 분위기가 아닌 구한말의 시간으로 들어온 듯한, 타임슬립 속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기분으로 차와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듭니다.  빈티지한 장소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법이 있습니다.



스마트 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손편지로 마음을 전하던 아련하던 시절에 만나, 지금도 맞은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는 집사람이 참 고맙고, 사랑스럽습니다.


종로는 참 좋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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