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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키너 Sep 24. 2018

비극과 열정의 단어 '디저트'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는 무엇인가요?

어릴 적에는 추석보다 떡국과 함께 한 살 더 먹는 설날을 더 좋아했었습니다. 설날은 어른들이 주시는 세뱃돈으로 용돈도 풍성해는 것은 덤이기도 했었습니다. 나이가 들고나니 한 살 더 먹는 느낌이 점점 더 무거워져 지금은 구정보다는 추석이 더 좋습니다.

 선선한 가을, 갖가지 먹을거리들이 넘쳐나는 수확의 계절의 추석은 설날보다는 더 없이 풍요롭습니다.

기름 냄새가 온 아파트 단지 안을 휘감고,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뭉근한 갈비찜 냄새와 단지 안의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까지 추석임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집에서도 밀린 드라마를 몰아보며 깻잎전과 동보 전, 고추전을 붙이며 맥주를 마십니다.

한식 교수님이 선물해주신 떡과 매작과를 디저트로 하여 집사람이 공을 많이 들였다는 식혜를 마시니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이해할 듯합니다.




사진 위 왼쪽터 시계방향으로 프랑스의 크램 뷜레, 독일의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 터키의 바클라바, 호주의 레밍턴


전 세계에도 추수감사절과 같은 수확의 명절이 있고 그들만의 디저트가 있습니다.


북미와 유럽은 나라별 가을의 특산물을 중심으로 한 설탕과 생크림의 조합된 디저트가 인기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호박 파이와 애플파이를 먹고, 프랑스에서는 Crème brûlée(크렘 뷜레)라고 불리는 프랑스 전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디저트를 먹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Gelato(젤라토)를 아이스크림처럼 먹으며, 벨기에는 설탕과 누텔라를 듬뿍 뿌려서 와플을, 독일에서는 초콜릿과 체리 생크림으로 장식된 Black Forest cake(블랙 포레스트 케이크)를 나눕니다. 호주에서는 초콜릿으로 감싼 스펀지케이크에 코코넛 플레이크로 뒤덮은  lamington(레밍턴)으로 달콤한 명절을 즐깁니다.

이슬람 문화인 터키는 유명한 터키쉬 딜라이트 중 하나인 얇은 페스트리에 견과류와 꿀이 덮인 Baklava(바클라바)를 먹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사동에서도 '꿀타래'라고 팔리고 있는  용수당(龍鬚糖)은 '용의 수염 사탕'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디저트로 널리 팔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과자는 아니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지만 이미 30년이 넘도록 우리나라에 정착하여 '꿀타래'라는 우리나라 디저트 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경단을 꼬치에 찔러서 모찌(찹쌀떡)의 나라답게 당고(団子)라고 불리는 부드러운 찹쌀떡 위에 조청을 바른 디저트가 인기 있는 추석 명절의 디저트입니다.


생크림과 설탕의 조합인 유럽의 디저트와는 달리 아시아 지역은 쌀로 만든 떡과 역시 쌀을 이용하여 만든 맥아당인 조청으로 단맛의 갈망을 채웠습니다.  

설탕이 없던 시절 단맛을 느낄 수 있는 세 가지는 방법은 꿀벌의 벌집에서 나오는 꿀, 과일에서 나는 단맛인 과당과 탄수화물에서 나오는 녹말을 분해하여 맥아당을 만드는 조청류의 엿당 등 세 가지였습니다.

지중해의 축복받은 기후의 유럽은 과일을 이용한 콤포트나 말린 과일을 이용하여 단맛을 충족하였습니다.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에서는 '맥아당'이라는 이당류의 당원을 얻습니다. 식혜와 조청이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조청과 식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두밥을 먼저 만들어 놓습니다. 그다음 엿기름이라고 불리는 전분 분해 효소 (starch degrading enzyme)를 첨가합니다. 디아스타제(diastase)라고 불리는 전분 분해효소가 엿기름에  포함되어 있는데, 엿기름은 보리를 발아시킨 발아보리로 '맥아'라고도 불립니다.

맥아는 맥주의 원료로 쓰여서 당화와 발효의 과정을 거쳐 알코올로 변화하여 맥주가 되기도 하고,  이렇게 식혜에는 효소의 역할을 하여 당화를 돕는 역할을 하여 식혜의 단맛을 내도록 도와줍니다.

이렇게 만든 식혜의 밥알을 건져내고 단물만 가마솥에 부어 하루를 꼬박 졸여주면 식혜의 단맛이 응축된 조청이 완성됩니다.

추운 겨울 부뚜막에서 가래떡을 구워 조청에 찍어 먹는 맛은 어릴 적 기억으로 어렴풋하게 남았지만, 단맛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도의 사탕수수 농장, 스트리트 푸드인 슈거케인 쥬스바에서 사탕수수를 바로 착즙하여 주는 모습



적도 지방의 인도는 사탕수수(suger cane)의 원산지로 설탕물을 추출하고 정제하여 설탕 만드는 최초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도의 결정화된 설탕은 의료용 약품으로 쓰이거나 감미료로 설탕 역사의 기원이 됩니다.


기원전 51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인도를 점령하면서 '벌이 없는 꿀'이라고 칭한 설탕도 발견됩니다.

그 후 사탕수수에서 추출된 설탕은 페르시아의 수출품으로 단맛의 '비밀'을 오롯이 간직합니다.  

설탕 제조의 비밀은 7세기경에 아랍이 번성하면서 아랍 문화로 흡수됩니다. 사탕수수의 재배는 이슬람 문화와 함께 북아프리카와 스페인까지 수출되어 설탕을 생산하게 됩니다. 이후 11세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설탕은 아랍에서 유럽으로 퍼지기 시작합니다. 사탕수수에서 추출된 설탕물은 고열로 정제되어 고체 형태로 가공되어 엄청난 가격으로 유통되며 '돌 꿀(stone honey)' 또는 기분이 좋아지는 '기적의 마약'으로 불리며 약용으로 거래되기 시작합니다.


유럽인들은 11세기 무렵 중세 시대에서야 설탕을 제조하기 시작했고 이때야 달콤한 디저트가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탕은 너무 비싸 부유층만이 소비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15세기, 동유럽에 이슬람 강대국인 오스만 제국이 등장합니다.  인도가 원산지인 설탕의 교역로가 막히자 포르투갈인 Henry 선장은 사탕수수를 재배할 새로운 지역을 물색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발견한 곳이 바로 서아프리카인 현대의 세네갈과 코트 디부아르, 가나 지역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적합한 적도 지역입니다. 서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비극의 서막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1444년 포르투갈의 악의적인 해적단은 서 아프리카에서 스페인 세비야까지 235 명의 서아프리카인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습니다. 유럽인들이 보기에는 사탕수수 농장의 발견도 중요했지만,  사탕수수를 재배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노동을 견딜 수 있는 건장한 노동자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1452년, 교황 니콜라스 5세는 교황 칙서 '둠 디베르사스'(Dum Diversas)를 선포하여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수 있는 법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무언지도 모르는 흑인들에게 노예를 합법화하는 인류 최대의 악법으로 기록됩니다. 이후, 유럽의 모든 국가는 노예무역에 가담합니다.




카리브해섬에 콜럼버스 착륙, Theodore de Bry, 목판, 1592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에 도착합니다.

인류 최대의 발견이라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합니다.  이후 스페인은 중남미 아메리카 대륙에서 설탕을 재배하기 시작하지만 설탕을 재배하기에는 남아메리카의 '원주민'이 적합하지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의 제러미 다이아몬드의 지적대로 유럽에서 온 천연두 등의 병원균(germs)들로 남아메리카 인구 대부분이 멸종하다시피 하고, 유럽인들에겐  설탕 농장에서 노동을 할 노예들이 필요했습니다. 대서양 노예무역의 식민지 노예 제도는 유럽인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가져다줄 최고의 수단이었습니다.  


그 사이 유럽의 패권은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다시 영국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동안 패권만 바뀔 뿐 남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흑인들의 생활은 똑같은 처지로 이어집니다.

이제 노예시장은 유럽의 부를 지탱하는 시장으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 노예시장을 만들고 노예무역을 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은 현대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 사상 경제 학자였으며, 불굴의 의지로 대항해에 도전하는 위대한 선장 불리는 사람들과 카톨릭의 존경받는 사제들과 교황이었습니다.






노예 수송선 단면, 수많은 아프리칸 노예들이 수송선에서 대서양을 횡단하는 몇달 동안 누워서 몸을 움직이지 못한채로 수송 되었다.

더 많은 노예들이 서아프리카에서 접혀와 아메리카로 이동하고, 더 많은 노동력이 투입된 설탕 생산량이 늘어나자 커피와 코코아, 차 시장이 확대됩니다. 그리고 다시 커피와 코코아 차 시장이 확대되며 더 많은 설탕이 필요하게 되고, 다시 더 많은 아프리칸 노예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특히 프랑스의 설탕 재배지에서의 노예제도는 가장 혹독하였는데, 많은 아프리칸 노예들이 카리브해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으며, 그들은 열대의 식민지에 도착해서 죽을 때까지 착취당하였으며, 도착한 후에 평균 수명은 5년 미만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설탕으로 인한 경제적 호황은 아프리칸 흑인들에게는 역사상 최고의 비극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절 프랑스의 디저트의 발전은 실로 놀라운 것으로, 설탕이 싼 가격에 공급되기 시작하자 과일과 꿀 정도만이 주재료였던  디저트 메뉴는 혁명과도 같은 발전을 맞이 합니다.

왕의 요리사라고 불리던 앙토넴 카렘(Marie Antoine Carême)을 필두로 수많은 프랑스의 파티시에들이 새로운 창의적인 디저트와 패스트리들을 선보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디저트(dessert)는 '식탁을 치우다'라는 프랑스어 단어 'desservir에서 나옵니다. 이 단어는 17 세기에 처음으로 메인 코스 후에 과자를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식사 후에 과일이나 치즈를 먹는 관습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디저트를 먹는 관습이 대중화되었습니다.


남아메리카의 설탕 농장의 노예들의 비극과 프랑스 파티시에의 열정이 만들어낸 단어 '디저트'입니다.


서양의 디저트의 역사는 화려한 만큼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아시아의 디저트들은 타인종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역설의 달콤한 맛이 아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매작과(梅雀果)는 매화 '매'자에 참새 '작'자를 써서 매화나무에 참새가 앉은 모양을 표현한 과자 이름입니다.

약과나 매작과 등 반죽에 꿀이나 조청을 넣어 반죽하여 튀겨 다시 조청에 집청하여 먹는 유밀과(油蜜果)의 한 형식입니다.  


유밀과 형식의 약과는 조선 후기 최남선 선생이 조선 상식 문답에서 조선 최고의 과자라고 할 정도로 예부터 유명한 과자입니다.  


우리나라의 약과(藥果)도 한자를 보면 약(藥) 자를 쓴 걸 보면 옛날에는 단맛이 병도 고칠 수 있다고 믿은 듯합니다. 어릴 적 감기나 몸살이 걸리면 어머니들이 달달한 시럽에 담긴 복숭아나 파인애플 깡통을 사 오신 기억이 납니다. 물론 과일 통조림을 먹으면 감기가 다음날 다 낫고는 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1990년대 학창 시절은 보낸 이들에게는 다 같이 공감하는 기억일 듯합니다.


'단맛은 인간에게 필요한 사랑과 유대감과도 같은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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