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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키너 Nov 04. 2018

김장하는 날

조리학과 신교수의 식탁 일기


가을철 학교 행사로 김장 담그는 날은 학교 주변 저소득층 노인분들에게 김치를 전달하는 김장 나눔 행사입니다.

음식을 같이 하며 소소한 행복을 같이 나누는 김장시즌엔 교직원들이 참석하여 떠뜰썩한 분위가 훈훈합니다.

 다른 전공 교직원들의 근황도 듣고, 결혼 소식, 득남 소식 등 이야깃거리도 풍성한 날입니다. 함께 김장을 하는 일은 구성원들에게 정서적 유대감을 만들기 가장 좋은 방법으로, 먹거리를 함께 만들고 나누는 것은 행복한 기억으로 자리 잡아 공동체를 이끄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김장을 잘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유치원에서도 김장을 담그는 행사가 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김장과 김치를 만드는 방법을 배웁니다. 한국에 시집을 온 다문화 가정 여성분들이 참가하는 김장행사도 많이 마련되어 있는데 김장과 김치를 담그는 것이 한국문화를 배우는 첫걸음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김치가 냉장고에 두둑하게 있으면, 김치 자체로 훌륭한 반찬이 되고,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 김치전, 김치 수제비 등등 다양한 반찬의 재료가 되어줍니다.


저녁으로 오늘 만든 김장김치 반포기를 얻어와 삼겹살 수육과 함께 저녁식사를 합니다. 오늘 갓 담근 싱싱한 김장김치와 삼겹살 수육 냄새가 풍성한 식탁입니다.




독일 작센 - 안할트 지방의 소금_암염 생산(1670년)


김장을 하려면 세 가지 필수 요소가 필요한데, 김장에 들어가는 소금과 채소, 그리고 항아리를 필요로 합니다.


삼면이 인접한 우리나라는 바닷물에서 천일염을 만들어 소금이 풍부하였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소금은 귀한 자원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 염전에서 햇볕에 말려 생산되는 천일염 생산방식은 1907년에 도입되어 그전까지는 자염(煮鹽)만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염이란 바닷물을 퍼서 솥에 끓여 수분을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땔감도 많이 들뿐 아니라  노동력도 상당히 요구되어 가격 형성이 비싸질 수밖에 없는 귀한 조미료였습니다. 순수 우리말인 소금이 한자로 '小金'으로 불리기까지 했으니  당시의 가치를 전합니다.

소금이 얼마나 귀한 조미료를 알 수 있는 '구황염(救荒鹽)'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구황염이란 백성을 구하는 소금으로 흉년이 들거나 재해가 닥치면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이 소금이라 소금을 나라에서 지급하였습니다. 흉년이나 재해에는 곡식보다 소금이 더 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소금길

소금은 또한 로마제국 초기 성장의 견인차를 유도하는데,  염전하고 자염 생산을 바탕으로 소금길(Via Salaria)을 만들어 전 유럽을 정복했습니다. 소금길은 유럽의 무역과 부를 흡수하여 로마제국을 건설하는 1등 공신 역할을 합니다.

소금길은 서쪽으로는 프랑스와 동쪽으로는 루마니아, 북쪽으로는 잘츠부르크까지 전 유럽으로 뻗어 나아갔습니다. 프랑스 켈트족의 소금광산과 로마인의 땅이라고 명명한 '루마니아(로마인의 나라라는 뜻의 România)', 소금 도시는 이름의 '잘츠부르크(Sal+zburg, 소금+성)'까지, 소금길은 로마로 하여금 유럽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합니다. 로마 병사들에게 소금으로 급여를 준 탓에 라틴어 sal(소금)은 봉급을 뜻하는 'salay'등 여러 가지 명사의 어원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소금을 먹지 못하면 수분과 체액의 농도, 영양소 불균형 등으로 사망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성서에 '빛과 소금'을 이야기하듯 소금은 빛과 함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조미료였습니다. 자염을 먹었던 우리와는 달리 유럽에서는 일찌감치 소금 광산이 발달하여 암염(岩塩, rock salt)을 소비하였습니다. 암염이란 지구의 지각운동으로 바다였던 지역이 일정 지역에 갇히게 되면서 염전 호수가 되고 증발, 퇴적되어 소금이 광물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소금광산은 유럽에서 독일, 스페인, 루마니아, 프랑스에 존재하여 전 유럽에 소금 창고 역할을 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 광산업의 발전과 함께 암염은 소금 소비의 패턴을 천일염에서 암염으로 전환시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금은 천일염(sea salt) 소비가 절대적이지만, 전 세계 소금 소비의 90%가 암염(rock salt)으로 소비됩니다. 현대에는 전 세계 소금 생산량의 6%만이 식품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소금을 분리하고 합성하여 눈을 녹이는 탄산칼슘, 비누와 세제에 사용되는 가성소다, PVC와 합성고무의 제조 등에 사용되는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귀중한 자원이기도 합니다.


코인 테일러 목사 사진집(1908년~1922년)

김치는 채소와 소금, 항아리, 우리나라의 사계절이 만들어낸 자연환경의 역사입니다.

소금과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채소의 조합으로 김치는 탄생합니다. 여기에 김치를 보관하는 항아리가 등장하며 김치는 완벽한 저장 발효식품으로 발전합니다.


초기 우리나라의 김치는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채소, 들과 산에서 나는 들나물과 산나물들이 소금에 절여져 추운 겨울 동계용 보관 저장식품으로서의 기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신라시대 재배되었던 순무, 가지, 죽순, 도라지 등이 갖가지 채소를 소금에 절여 저장과 발효과정을 거치며 우리나라만의 채소 절임 발효식품인 '침채'로 만들어집니다.

고려시대에도 침채의 명맥은 이어져 불교국가인 고려는 절임형 침채와 물을 많이 넣은 동치미도 등장합니다.

이 시대에도 빨간 김치는 인기여서 고추가 들어오기 전 빨간색 맨드라미 꽃으로 꽃물을 우려 김치를 물들였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시대 김치는 획기적으로 발전하는데 인쇄술의 발달로 농서가 보급되면서 농업생산성이 현저히 높아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양한 채소와 젓갈, 육류까지 김치에 첨가되면서 김치는 다양성을 가진 채소 절임으로 우리 민족의 밥상에서 빠지면 안 되는 중요한 식문화로 진일보하게 됩니다.

조선 초기에도 매운맛을 선호하여 초피와 마늘을 듬뿍 넣어 고추가 없던 시절 매운맛도 강조합니다.  

전의 침채에서는 보이지 않던 배추김치가 등장합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고추의 도입과 함께 배추와 무가 김치의 주재료로 등장합니다. 실학서 증보산림경제(1766)에 고추가 김치에 쓰였다는 점으로 보아 우리가 아는 '빨간 맛' 김치는 170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조선 후기, 보부상들의 전국적인 시장 확대는 조선시대 북쪽 함흥에서부터 남쪽 제주까지 음식문화의 확장과 각 지방 농산물들의 '컨버젼스(융합)'를 만들어 냅니다. 1800년대에는 배추의 개량도 이루어져 현재의 결구형 배추가 생산되고, 지금과 같은 김치로 모양을 갖춥니다.

이후, 각 지방의 기후와 풍토에 맞게  발전한 김치는 각 지방의 개성을 담뿍 담은 맛으로 정착됩니다.


겨울이 길고 추운 한반도 북부는 소금과 고춧가루를 적게 쓰는 국물이 많고 채소의 향을 살린 김치를 주로 만듭니다. 특히 북쪽 지방의 김치는 겨울이 길어 김치가 더디 익는 특징으로 싱겁고 맵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북의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만들어 내는 냉면의 맛은 전국을 사로잡게 되었으며 냉면 문화의 발전을 이끌어 가게 됩니다.

중부지방은 담백한 김치를, 겨울에도 날씨가 따듯한 남부지방에서는 소금과 각종 양념을 많이 넣어 만든 '남도 김치'를 담가 먹습니다. 남도 김치는 겨울에도 북쪽 지방과 달리 온화한 기후로 고춧가루와 마늘 젓갈류를 많이 넣어 오래 저장할 수 있도록 맵과 짠맛이 특징입니다.


다양하게 발전되어 가는 김치는 고추장, 된장과 함께 한국의 음식문화를 정착시킵니다.






항아리가 없으면 김치를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항아리의 보급은 김치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하드웨어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 민족만이 가진 옹기의 문화는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데, 신라 초기의 굽이 달린 질그릇 토기에서부터 점점 배가 불러지는 용기인 항아리로 발전합니다.

옹기 중에서 큰 옹기는 독이라고 부르고, 작은 옹기는 단지라고 불렸습니다. 김장독과 꿀단지처럼 말입니다.

옹기는 지금의 김치냉장고보다 훨씬 귀하고 비싼 물건인지라 강원도와 같이 나무가 풍부한 지역에서는 나무로 만든 독이 사용되었습니다. 통나무 김칫독은 독성이 없는 버드나무를 많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기름 먹인 한지를 발라 국물이 새지 않도록 하고 가볍고 오래 쓸 수 있는 장점으로 옹기 대신으로 널리 사용됩니다.


토기 항아리를 굽는 요성장(窯成場,조선시대 항아리를 굽는 곳)에서 살아 숨 쉬는 옹기 항아리가 탄생하고, 전국적으로 일반가정까지 보급되면서 김장 후 땅속에 김칫독을 묻고 김치를 보관합니다. 옹기가 보급되자 여름에는 우물이나 냇가에 담가 김치를 시원하게 보관하고, 겨울철에는 땅에 묻어 얼지 않게 움막을 만들어 보관하였습니다. 이를 김치광이라 부르는데 김장을 하고 땅에 김치를 묻어 볏짚으로 움막 형태의 김치 저장고를 만든 것을 칭합니다. 1990년대 호텔들마다 '김치광'이라는 부서가 있을 정도로 김치를 각 호텔에서 직접 담그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요성장에서 굽는 가마식 항아리의 전국적인 보급으로 김치는 눈부신 발전을 하고 한민족의 음식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김치냉장고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항아리의 보급, 젓갈의 다양화, 고춧가루와 배추의 등장으로 각 지방의 김치들은 완성된 각 지역의 특색 있는 김치로 발전을 거듭합니다. 김치는 구개음화 현상으로 침채- 딤채-김치로 이어지는 언어의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김치로 불립니다. 김장 역시 침장이 김장으로 변화를 거칩니다.



채소를 소금과 식초에 절여 먹는 방식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문화로 중국의 쨔사이나 일본의 단무지, 유럽의 올리브와 오이 피클도 있습니다. 독일 김치로 불리는 유명한 사우어 크라우트도 비슷하지만, 우리나라의 김치처럼 소금에 절여 1차 발효를 한 후, 마늘과 고추 갖가지 양념을 하여 저장 발효하여 먹는 음식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어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음식 문화로 인정됩니다.

1960년대 파독 광부들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사우어 크라우트에 고춧가루와 비슷한 파프리카 파우더를 듬뿍 넣고, 독일 소시지를 넣어 김치찌개를 먹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1980년대 미국으로 유학하신 선배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매운맛이 사무 칠 때 베트남 쌀국수에 고추장과 비슷한 '쓰리라차 소스'를 듬뿍 풀어 먹었다고 합니다. 저의 유학 시절 또한 다르지 않아서 추석에 소박하게 끓여 먹던 김치 수제비를 잊지 못하고, 우리 맛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요즘은 한국음식 축제가 미국에도 있고, 한류의 한 축으로 동남아시아까지 유행이 확대된다 하니 참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졸업생들의 취업도 과거 미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남미까지 구인의뢰가 들어오는 걸 보면 '한국 음식이 많이 유행하고 있나 보다'라고 체감하게 됩니다.




오늘은 학교에서 김장을 하고, 내일은 귀농한 큰누님이 배추농사를 지어 식구들과 김장을 하는 날입니다. 온 가족이 모일 생각을 하니 기대가 앞서지만 허리가 약간 뻐근합니다.


'김장을 하는 계절이구나!' 생각하며 저녁을 맛있게 먹고, 약국에 파스를 사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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