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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하라 강변 Jan 03. 2021

20 향기

- 집콕 힐링기

어려서부터 '냄새'에 민감했다. 좋지 않은 냄새는 물론, 자동차 및 화장실 방향제와 같이 폐쇄된 공간에서 좋지 않은 냄새를 인위적으로 없애기 위한 강한 향기를 싫어했다. 그런 향기를 오래 맡으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리가 띵하고 어김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향기를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주관적으로) 좋은 향기에는 본능적으로 끌렸다.


어린 시절, 향기로 기억되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초기 브런치 글, 댄스필름 리뷰에서 눈치를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내가 무용공연을 즐기는 것은 초등학교 4년 동안 무용을 배운 영향이 크다. 그것도 1~2학년 한국무용, 3학년 발레, 4학년 현대무용, 참으로 다양하게 배웠다. 어린 시절의 그런 경험들은 내 문화생활의 탄탄한 토대(?)를 쌓아주었다.) 향기 나는 사람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한국무용을 배우던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다. 당시 50대의 원장 선생님은 작은 도시에서 원로(?)급으로 이름이 나신 분이셨고 보통은 그분이 직접 지도를 해주셨다.


그런데, 선생님의 제자이신 대학생 또는 대학을 갓 졸업했을 법한 '젊은 여자 선생님'이 한동안 수업을 해주신 적이 있었다. 무용을 전공하셨으니, 몸의 선과 얼굴이 아주 예뻤고 원장님에게는 이미 지나가버린 '젊음'이란 것을 갖고 있었다. 아기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증명된 것으로 아는데, 젊고 예쁜/잘생긴 사람에 대한 호감은 남녀노소 불문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어린 초딩 제자들이 선생님에게 쪼르르 달려갔고, 가까이에서 호기심 가득 이것저것 질문하며 함께 어울리고 싶어 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여 선생님을 따르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언제나 가까이 가면 나던 좋은 냄새, 향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좋은 냄새의 정체가 너무너무너무 진짜진짜진짜 궁금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늘 좋은 냄새가 난다며, '이 냄새가 어디서 왔는지, 비누나 샴푸, 바디워시, 바디로션 어떤 걸 쓰시는지, 아니면 섬유유연제인지' 몇 번을 물어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선생님은  "모르겠는데?..ㅎㅎ"라고 하시며 웃기만 하셨다. 신비주의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무용 후 땀을 흘린 뒤에도 좋은 향기가 유지되었으니, 그것은 아마 향수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이 향수라는 것을 알턱이 있나. 그래서 내 질문의 보기에는 향수가 빠져 있었다. 나는 그 첫 경험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사람이 향기로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엄마 아빠 두 분이서 해외여행을 갔다가 돌아오시며 선물을 사 오셨는데, 면세점에서 산 엘리자베스 아덴 향수 미니어처 세트였다(4~5개 들이였는데, 그중에 썬플라워를 제일 좋아했다. 다른 것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내 향수였다. 이후 브런치 글에서 여러 번 등장한 적이 있는 '미국 사는 둘째 이모'가 한국을 오가거나 할 때 여러 화장품과 함께 에스티 로더의 '뷰티풀', '노잉', 샤넬 '넘버 파이브' 같은 향수를 엄마에게 선물해 주셨는데, 엄마는 잘 쓰지 않는다며 욕실 선반에 장식으로 올려두셨다. 그래서 내가 가끔 공기 중에 분사해서 좋은 향기를 맡곤 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본격적으로 향수를 쓰기 시작했다. 20세 성인식에 인기 있는 선물이 장미 스무 송이와 향수 아니던가. 내 돈을 주고 직접 산 첫 번째 향수는 엘리자베스 아덴의 '그린티'였다. 향이 강하지 않고 은은해서 입문용으로 쓰기 좋은 향수이며, 여전히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부담 없이 쓰기 좋아 20대 초반에 자주 애용했다. 20대 중반에 좋아했던 향수는 에스티 로더의 '노잉(Knowing)'이었는데, 강해서 자주 쓰지는 못했으나, 특히 매료된 향수였다. 그래서 해외직구가 보편적이지도 않았던 시절, 향수 대신 미국 옥션 경매로 국내에 팔지 않던 노잉 바디로션을 구입하여 썼는데, 쓸 때마다 지적인 커리어 우먼, 도도한 여배우가 된 것 같은 황홀한 느낌을 받곤 했다.


30대에 변호사가 되어서 자주 사용한 향수는 에르메스 '켈리 깔레쉬' 오드퍼퓸이었다. 정장을 주로 입고 공식적, 비공식적 내외부 미팅이 많은 사내변호사로 근무할 때 커리어 우먼의 도회적인 이미지를 주면서도 흔치 않은 향이어서 주로 애용했다.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의상을 입을 때는 동일한 브랜드의 '주르 데르메스'를 썼다. 고급스럽고 우아한 플로럴 향이며 관능적이기까지 한 향이다.


최근에는 좀 더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향에 빠지게 되었는데, 불리의 '오 트리블 헬리오트로프 드 페루'(헉 길다!)라는 통카빈, 제비꽃, 화이트 플라워의 섬세한 향기를 가진 향수를 자주 쓴다. 이 제품은 보통의 향수와 달리 알콜이 함유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순하고 은은한 대신 지속력은 떨어지는 편이다. 타인에게 '나 향수 뿌렸어요' 얘기하는 향이 아니라, 뿌렸는지 나만 알 수 있는 그런 자기만족적 향수. 여행 중 새벽에 일찍 일어나 근처 숲속을 산책할 때 나는 은은한 야생화 냄새같다고나 할까.


코로나 시국에 집에만 있다 보니, 기분전환을 위해 향이 좋은 핸드워시, 캔들, 룸 스프레이, 입욕제, 향수를 더욱 자주 사용하게 된다. 마사지 샾에서 괜히 허브나 아로마 오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향기는 기분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키고, 힐링하게 만든다. 노트북 근처에 캔들을 두고 은은히 풍겨오는 향기를 맡으며 글을 쓰는 것은 내 브런치 생활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2021년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 백신과 치료제 등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고 있지만,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되려면 아직 멀었고, 사회적 거리두기나 재택근무 등으로 집콕 생활이 이젠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였으니, 집콕 생활의 힐링템으로 향기템들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단, 향기에 대한 선호는 매우 주관적일 뿐 아니라, 향수의 경우 자신의 체취와 뒤섞여 발향하고, 보통 알콜 베이스 향수의 경우 시간의 변화에 따라 탑-미들-베이스 노트로 그 향기에 변화가 있다. 그러므로, 최소한 직접 시향해 보거나, 샘플 제품을 구입해 자신의 신체에 직접 사용해 보고 본품을 구매하기를 권한다. 향수는 용량 대비 매우 고가이기 때문이다. 해외직구로 구매하면 저렴하기도 하나, 인터넷 평균 가격보다 현저히 저렴한 제품은 가짜 제품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내면의 향기면 더없이 좋겠지만,

일단은, 리얼 좋은 향기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 K.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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