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을 만들게 된 시작점
진부한 시작점 일지 모르겠지만 최근 1년 반 정도의 기간 동안 내 생활 패턴을 크게 변화시킨 도화선은 아마도 여행이었던 것 같다. 내가 습관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발리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그 여행을 통해 인생이 바뀌었고 하는 그런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처음에는 갔다 와서 보니 차이를 느낄 정도의 생활습관이 바뀌어 있었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이 들었던 정도였다. 어쩌다 주말인데도 아침에 눈이 떠지고 밖을 바라보거나 사색하면서 좋은 하루를 시작했던 적이 있었다.
2018년 여름 이야기이기 때문에 곧 있으면 2년이 다 되어 간다. (이 시작점으로 발화된 현재 루티너리 앱의 초기 앱 굿모닝은 2019년 2월에 첫 배포를 했다) 나에게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는데 기억이 조금 흐릿해졌고, 좋은 기억들이 많았던 만큼 고민과 생각할 것도 많았던 다사다난했던 기억이 왜곡되고 있어서 점점 미화되고 잊히기 전에 발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사실 발리를 가게 된 배경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운 좋게 연이 닿아 가기 직전까지 한동안 대학원 연구실에서 하는 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 개인적인 지적 욕구와 도전정신을 충전받기도 했고 재미있었지만, 회사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계속 들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이러려고 창업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여전히 우리가 비즈니스 모델을 실행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먼저 환경의 변화를 제안한 건 동료였다. 대표로서 아마 나보다 더 많은 고민을 했을 그가 말하긴 했지만 나는 처음에 회의적인 부분이 있었다. 당시 구체적으로 얘길 하진 않았지만 난생처음 카드값을 내지 못해 리볼빙을 신청할 정도로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았고, '한 달 살기'는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도 모자랄 판에 너무나 사치스럽게 느껴졌고 더 큰 문제는 가야 하는 이유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있는다고 해서 아이디어가 샘솟는 것도 아니고 이미 갈길을 잃은 것 같은 날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환경을 바꾸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올 때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확실하게 잡고 가는 조건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자체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었고, 한 달 안에 가능할까 많은 부담감을 안고 출발했다.
발리에서 나는 햇살이 잘 드는 게스트 하우스에 묵었다. 아침과 저녁의 풍경이 정직한 곳이었다. 오전에는 햇살이 들어와 잠을 깨고,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에 전등을 끄듯 주변이 어두워져 길을 걸어 다닐 때 어두운 길가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때 나는 숙소에서 한 두 블록 정도 넘어가면 있는 요가원에 한 달치 여가비용을 다 때려 넣어서 (그때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매일 아침 요가 수업을 들으러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곤 했다. 오전부터 저녁 6시 해가 지기 전까지는 같이 일을 하는 시간이어서 오전이나 저녁이 괜찮은 시간이었는데 저녁엔 밤길이 어둡기도 했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강아지들 중(발리에서 가장 충격이었던 일 중 하나, 길에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많이 돌아다닌다) 가끔씩 하얀 백구가 아침에 나와 같이 요가 가는 길을 동행해주곤 했기 때문에 아침에 가는 게 더 좋았다.
내가 발리 하면 제일 많이 기억하는 장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한 달을 쭉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이고 하나는 요가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매일 저녁 스쿠터를 타고 가서 봤던 노을 진 해변이다.
그때 우리가 가진 예산은 많지 않았다. (아마 기억하기로는 왕복 비행기 값을 포함해 인당 140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게스트하우스 한 달 렌트비가 인당 40만 원이었으니 한 달 생활비가 대충 계산이 되리라. 여기에 여가비나 스쿠터 대여비(스쿠터 없이는 돌아다니는 게 아주 힘들다)를 제하고 나면 게스트 하우스에서 한 끼는 밥을 해 먹고 돈을 모아 조금 비싼 식당을 가곤 했다. 참고로 발리의 식당은 싼 곳은 아주 싸고 비싼 곳은 아주 비싼 편이다. 마음만 먹으면 미고랭이나 나시고랭은 양껏 먹을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세계 1위를 한 음식이라 해도 한 달 내내 나시고랭만 먹고살고 싶진 않았다.
우리가 머문 게스트하우스는 작업공간이자 회의실이자 식당이었고, 잠자리였다. 일할 환경이 갖춰졌겠다 이제 목표를 이루는데 집중만 하면 되는데 구체적으로 할 일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시작하려니 방향은 못 잡고 머리는 아프고 회의를 할 때면 감정이 격해져서 싸우기 일보직전까지 갈 때가 많았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걸까? 오히려 환경이 바뀌어 기존의 일상에서 느끼던 것들도 사라지면서 혼란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대책 없이 갔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게 당연했던 걸 수도 있었다. 마냥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일주일에 한 번은 날을 잡아 강도 높게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조급함에서 나와 의도한대로 진행되지 않은 게 있었다.
사실은 발리에 간다 말을 하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발리의 느낌(디지털 노마드, 자유로운 삶, 서핑, 카페에서 브런치와 코딩 등등)과는 사뭇 다르게 나의 발리는 하루하루가 치열했었다.
그렇지만 환경의 변화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은 의외에 있었는데, 공기 좋고 날씨도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고 자연과 가까운 곳에 있기도 하고 너무나 상냥하고 낙천적이며 긍정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져 있다보니 아무리 고민거리가 넘쳐도 스트레스가 반감된다는 점이었다. 의도와 상관없이 우연히 얻은 장점이었다. 만약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새로운 환경으로 갈 때는 결과를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고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갈거란 생각을 조금 내려두어야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