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제가.. (구구절절)
정리 잘 못하는 사람의 특징
TMI를 하자면 사실 나는 정리든 청소든 일단 깔끔함과는 항상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방을 청소한다는 건 내겐 항상 '대청소'를 의미했다. 정리를 즐기지 않는 이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나는 한번 치울 때 각 잡고 치워' 평소에 깔끔함을 유지했다면 유난히 각 잡는다는 표현을 하진 않을 텐데 말이다. 이 말은 평소의 기본 값은 지저분함이란 의미다. 그런 사실을 나는 대놓고 외면했었다.
정리 잘 못하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의 문제는 잘 모르지만 남 지저분한 건 잘 발견하고 지적한다는 것이다. 친언니는 우리 집의 대표적인 맥시멀 리스트인데, 어쩐 일인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것은 모든 게 반영구적이다. 다 쓴 물건도 귀엽다고,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도 언젠가 필요하다며, 그것도 아니면 추억이 담겨있다며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물건이 많다고 해서 정리를 못하고 지저분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물건들이 갈길을 잃고 이상한 곳에 올려져 있거나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항상 집을 내려가면 언니의 방 상태를 보고 놀리곤 했다.
문제는 내가 그럴만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언니처럼 무언가를 사다 모으는 성격도 아니고, 가진 물건도 많지 않은데 왜 이렇게 정리가 안 되는 걸까? 어느 날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 내가 널 부러트려 놓은 물건들을 보더니 나보고 하는 말이 내가 맥시멀 리스트란다. 나는 그 날 내가 맥시멀 리스트라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에게는 다 꼭 필요한 것들
어느 것 하나 필요한 것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다 본인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것들이다. 다행히 그 당시에 나는 정리하는데 한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왜 생각처럼 정리가 안되는지 고민하고 있었고, 덕분에 친구 말을 잘 받아들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인지 할 수 있었다. 아마 평소처럼 가볍게 들었더라면 '무슨 소리야 지금 네가 급하게 와서 내가 정리를 제대로 못해서 그래' 라던지, '집이 작아서 많아 보이는 거야' 하면서 이유를 만들어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깨달은 건 깨달은 거고 그다음 문제는 사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은 맥시멀 리스트라기보단 미니멀리스트에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월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는 항상 간소하고 단정하고 정리정돈이 잘 된 삶과 그런 정체성을 원했는데 말이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변명들은 다 내가 바라는 것과 지금 현재 상태의 차이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정리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본격적으로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시기는 정확히 2년 3개월 전이었다. 그때가 처음으로 기숙사와 고시원을 벗어나 집다운 집으로 이사한 시기였고, 환경의 중요함을 알아가고 있던 중이라 그 해 목표 중 하나가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 해에 처음으로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곤도 마리에라는 정리의 대가를 알게 되기도 했고, 의욕이 넘쳐서 많은 것들을 버리기도 했다. (알고 있는가? 정리의 시작은 버리는 것에 있다.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결정이었다. 사실 뭘 버렸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거 보니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나보다. 원래 홀로 독립을 할 생각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동생과 같이 살게 되면서, 동생은 나의 변화를 옆에서 같이 경험해야 했다. 한동안 내가 무슨 말만 꺼내면 '왜, 또 버리려고?' 하며 경계를 하더라.
버리는 것은 의욕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집이 원하는 수준까지 정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공간의 의미가 분리되고 어느 정도는 정리가 된 걸 느끼긴 했지만 그때는 수납하는 것에 대한 노하우도 부족했고, 정리를 한번 해놓아도 유지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 몇 가지 습관이 들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은 반드시 정리를 한다. 정리하는데 1분이 채 안 걸리지만 정리가 좋은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준 습관 중 하나였는데, 밖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 정리된 침구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정리한 거긴 하지만 내가 쉴 수 있게 준비되어있고 배려받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집을 며칠 비울 때는 집을 최대한 깨끗하게 하고 떠나는 것이다. 부모님 집에 내려가기 전에 항상 이불빨래부터 바닥, 화장실, 부엌 다 깨끗하게 하고 갔다가 돌아오면 피곤했던 게 금방 풀린다. 집은 항상 내가 쉴 수 있는 곳이란 메타포에 맞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집다운 것 같다.
정리하는 사람
이번에 이사를 오면서 조금 더 발전된 건 이사 온 곳이 빌트인으로 수납할 공간이 전혀 없어서 수납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을 한 이유가 컸다. 정리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수납공간인 것 같다. 올바른 자리에 올바른 물건이 있다는 게 사실 정리의 모든 것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이사하고 나서 공간을 마음에 들도록 꾸미는데도 많은 노력을 들였다. 좋아하는 공간에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공간을 만들면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게 들지 않을까 기대한 것도 없지 않았는데 잘 통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집수리 문제로 집주인분이 잠깐 집을 들리셨다가 집을 잘 꾸며놨다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내가 드디어 정리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요즘엔 사실 집 정리하는 게 재밌기도 하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아침 루틴이 끝나면 조금 쉬다 늦은 아침을 먹고 청소를 시작한다. 청소는 다해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지만 일주일 정도는 청소를 많이 하지 않아도 그 상태로 유지가 된다. 안 치우고 살다 한 번씩 '대청소'라는 걸 했을 때는 적어도 반나절은 걸렸던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한 번도 살면서 집을 청소하는 게 즐겁다는 말에 공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변화의 시작
지금도 나는 정리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변화의 과정에서 있으면서 모든 변화가 나의 현재 상황을 깨달으면서 시작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최근 고민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려울까였는데 이 질문에 일부를 답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일 중 하나는 내가 이미 그런 사람이라고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언니와 다르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기 스스로는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퍼포먼스가 안 나오거나 주변에서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면 그건 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다. 거기서 자신이 정말 원했던 정체성은 어떤 것이고 자신의 현재 상황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변화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