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현주 Nov 08. 2020

어묵탕이면 다 되지 않을까?

따뜻한 어묵탕의 맛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내 홈 오피스 (여전히 나는 재택으로 일하는 중이다)는 창가에 붙어 있어서 아침에 자리에 앉으면 제법 찬기운이 느껴져 자연스럽게 패딩조끼를 찾게 된다. 저저번 주를 바삐 보내고 번아웃에 대해 글 쓴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여전히 바쁜 주간을 보내고 있다. 이번 주는 정신적 힘듦이 아니라 그냥 체력이 방전되어버렸다. 주말 이틀 내내 오전 9시에 일어났다. (원랜 7시에 일어나니 평균 2시간 늦게 기상한 것이다)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루틴은 꼬박꼬박 했다. 오전 중에 가장 기분 좋은 시간은 막 샤워와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뜨거운 커피를 한잔 만들고 창가 쪽에 앉아 글을 쓸 때이다. 원래는 책상에 앉아 글을 썼는데 어느 순간부턴 창가 쪽을 바라보고 식탁에 있는 스툴을 들고 와 앉아 밖을 바라보면서 글을 쓴다. 사실 정면으로 보면 다른 건물 벽밖에 안 보이고 측면으로 고개를 돌려야 전선 가득한 전봇대 위로 하늘이 보인다. 아무렴 하늘만 볼 수 있으면 괜찮다. 주말 내내 날씨는 쌀쌀했어도 하늘은 파랗게 구름 한 점 없었다.


나는 안다. 아침에 일어나 루틴을 하지 않았다면 내게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없었음을. 그리고 그 선택 덕분에 오늘 하루가 제대로 시작했다는 것을. 요즘같이 게으름 피우고 싶은 날들이 많아질 때마다 나는 새삼 이 시간이 내게 그냥 찾아온 게 아니라 내가 얻은 시간이란 걸 느낀다. 그래서 그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침으로 커피와 함께 어제 동생이 사 온 시나몬 맛이 나는 빵을 먹고 빨래와 재활용할 것들 정리하고 청소를 했다. 어제저녁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발견한 다큐에 꽂혀서 오전에 루틴이 끝나고 그걸 보며 시간을 보내고, 읽고 싶은 책을 골라서 읽으며 유유자적하게 오후를 보내다 잠들었는데 5시가 넘어 일어났다. 목이 타서 물 마시면서 잠깐 거실에 나와 돌아다니고 있는데 동생도 자다가 이제 깼나 보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다. 공복이어서인지 속이 헛헛하기도 하고 메슥거리기도 하고 동생이 나온 김에 저녁을 먹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먹을까 고민이 되었다.


참고로 동생은 요리를 잘한다. 학생 때 스페인에서 혼자 1년을 살다 왔는데 거기서 보쌈도 해 먹고 가끔 밑반찬 만든 걸 찍어서 우리 집 단톡 방에 올려주곤 했었다. 혼자산 건 내가 더 오래 살았는데 난 요리랑은 거리가 멀다. 집에선 내가 동생이랑 사는 걸 감사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라이프 패턴이 달라지면서 각자 알아서 챙겨 먹을 때가 많긴 하지만 집에서 뭘 해 먹을 때 동생이 있어서 든든한 건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리틀 포레스트'에 나오는 것 같이 따뜻하게 김이 모락모락 나고 담백하고 깔끔한 무언가였다. 그래서 뭘 먹고 싶은 거냐고 하다 이전에 언니가 집에 놀러 왔을 때 먹었던 어묵탕이 생각났다. 언니가 놀러 오면서 엄마가 들려 보낸 북어포가 있었는데 북어와 무를 넣고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 칼칼하게 끓인 어묵탕이 너무 맛있었다. 비 오던 여름날 아침과 어묵탕은 꽤 잘 어울렸다. 그것도 동생이 만든 거였는데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엄청 맛있었다.


그때 쓰고 남은 북어포가 여전히 냉동실에 있었고, 어묵과 청양고추, 무만 사 오면 돼서 집 앞 마트에 바로 다녀왔다. 알고 보니 바로 물에 넣고 끓이는 게 아니라 북어를 간장에 한번 볶아준다고 한다. 다음에는 만드는 걸 배워봐야겠다. 사실 나도 요즘 요리에 조금씩 관심을 두고 있긴 하다. 근데 참 신기한 건 같은 요리를 해도 동생이 한 요리에는 뭔가 다른 특별함이 있다. 그 손맛이 부럽다. (아니면 그냥 남이 해준 요리가 더 맛있는 걸까?) 이번엔 엄마가 택배로 보내줬는데 안 쓰고 싹이 조금 난 감자를 동생이 감자전을 해야겠다고 해서 나는 감자를 갈고 그동안 동생은 어묵탕을 준비했다. 감자를 다 갈고 싱크대 정리를 하는 사이 어느새 어묵탕은 다 만들어졌다.


사실 나는 어묵탕에 어묵보다 무를 더 좋아하는데, 무을 베어 먹고 국물을 마시니 딱 내가 원하는 그 맛이었다. 예전에는 왜 어묵탕을 좋아하지 않았더라.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밖에 돌아다니다 보면 트럭에 어묵과 핫도그를 파는 가게들이 종종 있었는데 아빠가 한 번씩 어묵 꼬치를 하나씩 사주셨었다. 손으로 받아 들긴 했지만 나는 어묵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사실 잘 몰랐었는데 핫도그처럼 달달하지도 않고 소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묵탕은 뭐랄까, 약간 위로의 맛이다. 추운 겨울 따뜻한 어묵과 국물이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서 온기를 주는 그런 맛이다.


그렇게 저녁에 뜨끈하고 시원한 어묵탕을 먹으면서 오늘 하루가 딱 적당하게 잘 채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그 순간만큼은 '어묵탕이면 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완벽했다. 

지금 같은 날씨에 다들 어묵탕 한번 끓여 드셔 보시길 권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힘을 많이 줬던 한 주의 주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