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틀 벗어나기 프로젝트
엄마와 나의 견해차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항상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거침이 없는 편이었고 엄마는 그런 내가 실수할까 봐 고치려고 했었다. 지금 보면 엄마는 내가 싫다고 안 하는 것을 참 병적으로 고치려고 했었던 것 같다. 당연히 인간은 살면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또는 공동체에서 같이 존재하기 위해서 때로는 싫은 것을 해야 한다. 지금이야 다 컸고 사회화가 됐으니 아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아직 어리고 사회화하는 과정에서는 그런 것을 잘 모르고 신경을 안 쓸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부분에서 엄마가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원만한 방식으로 나를 지도 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어른이 돼서도 의견 차이가 생길 때마다 내가 져야만 싸움이 끝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학교를 붙었다는 것을 말하기가 두려웠다.
나는 사범대를 나와서 임용고사를 세 번 봤다. 4학년 때 한번 졸업하고 두 번 봤던 임용고시는 1년에 단 한 번 볼 수 있기 때문에 졸업하고 2년 동안 고시 공부를 하듯 공부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깊은 마음속에 나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공부할 때 그렇게 절실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임용을 더 이상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을 때 더욱 동기 부여가 됐고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어가 전부인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 싫었다. 영어는 그저 수단으로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한국에서 여자로 살면서 교사를 하는 것이 정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공무원으로 잘릴 걱정 없이 육아휴직도 보장된 곳에서 일을 하고 시간이 나면 엄마랑 재밌게 놀기도 하는 그런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나도 엄마의 그런 생각을 따랐기 때문에 엄마 말에 따라 사범대에도 진학하고 임용도 준비 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영어 강사로 일하면서 돈을 모으며 유학을 준비 하고 실제로 합격 이메일을 받았다는 사실을 엄마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처음 지원을 시작하고 나서는 어떤 학교에도 붙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엄마한테 유학 준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해놨는데 그리고 엄마는 내가 당연히 붙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 곳도 붙지 않으면 정말로 내가 망상이나 하는 또라이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붙어야 했다 어디든.
그런데 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붙어서 무서웠다. 아마 엄마한테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을 은연중에 예상했던 것 같다.
줄줄이 불합격 소식만 듣다가 합격 이메일을 처음으로 확인한 날도 평범한 아침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었던 나는 그날도 습관적으로 일어나자마자 이메일을 확인했다.
“Congratulations! We are excited to inform you that you are admitted…”
첫 합격 이메일이었다.
합격한 학교는 Virginia의 플래그쉽 대학인 University of Virginia로 동부 Charlottesville에 있는 학교였다. 지원한 학과는 교육심리였다. 교육에서 심리 쪽으로 전환해 궁극적으로는 임상 심리 박사과정을 꿈꾸고 있던 나에게 거쳐 갈 수 있는 최적의 중간 다리였다.
근데 오후쯤 혹시 몰라 다른 학교에서도 이메일이 오지는 않았나 싶어서 이메일 창에 다른 학교들을 검색했을 때 그날 아침 University of Washington 교육심리학과에서 버지니아보다 5분 일찍 합격 이메일이 와있던 것을 발견했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마지막으로 온 이메일이 버지니아여서 그 이메일에 가려져 있던 것이었다.
너무 신났다. 이 정도로 신났던 적은 처음이었다. 대학교에 갈 때도 직업을 고를 때도 나는 온전히 내가 생각하고 고민해서 선택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주도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해서 좋은 결과를 낸 것이었다. 너무 좋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엄마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에 매우 행복했다.
“갔다 와서도 그러면 결국 영어 강사 하는 거 아니니?”
조심스럽게 학교에 붙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나서 들었던 말이다.
굳이 똑같은 것을 할 거면 왜 미국에까지 큰 돈을 들여서 가야 하는지도 물었다. 당연히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영어 강사를 다시 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설령 주변에 그런 사례들을 많이 봤다고 한들 ‘우리 딸 열심히 했구나! 잘했어’라는 한마디를 듣기가 이렇게 힘든 건가 싶었다. 결국 이때도 엄마와의 대화는 별로 좋지 않게 끝났다.
이날 깨달았다. 엄마에게 인정받는 것을 내 삶의 목표로 하면 안된다는 것을. 엄마의 인정을 받으려면 엄마의 말을 따라야 하거나 누구가 인정하는 성취를 이뤄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내 삶의 목표는 결과를 이루기 까지 엄마한테 인정이나 이해를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매우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평생을 희생하고 열심히 돈을 벌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아무래도 그래서인지 몰라도 굉장히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마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생각했을 때 나에게 최선인 인생을 살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의 세상에서는 여자는 그저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적당히 벌면서 아이를 기르고 남편이 주로 돈을 벌어오는 그런 것이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구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딸내미가 엄마 말을 잘 따라주는 그런 아이였으면 엄마한테도 좋았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는 딸은 주도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도 매우 주도적인 사람이다. 아빠가 돈보다는 명예가 더 중요한 직업을 선택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한동안 우리 집의 가장은 엄마였고 엄마의 수입이 한때는 가장 높았을 정도로 엄마는 참 강하고 주도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딸내미는 편하게 살게 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아마 이런 엄마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에 나도 엄마의 말을 줄곧 따랐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는 나를 위해서 엄마의 딸이 아닌 내가 원하고 즐거운 것을 스스로 찾아가는 나의 인생을 살기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