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사랑해도 서로가 가진 속도가 다르면 상대가 버거울 때도 있다. 그럴 때 두 사람은 오해를 하고 상처를 받는다. 나만 너를 더 사랑했어. 아니야, 나는 단지 그 사랑이 조금 버거웠을 뿐이야. 버거웠다면 사랑하지 않은 걸까. 열정적인 사람은 늘 더 상처받고, 덜 열정적이었던 사람은 미안해한다. 그러나 단지 속도가 느린 것이고 진실로 사랑했다면 스스로의 마음을 끝까지 파헤쳐보는 여정을 감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에 대한 이야기다.
1. 술 자리 장면
5명의 친구들이 모였다. 그중에 도모야(남자) 와 가호(여자)가 약혼을 발표한다. (포스터 속 두 인물) 그런데 겐이치로( 오카베 나오)가 대놓고 질투한다.
나는 가호를 사랑했어. 가호, 이혼하면 나랑 결혼하자.
이 발언에 당연히 분위기는 어색해진다. 여기서 느껴진 것은 열정 이란, 질투와 무모함으로 변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첫 시작은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서 사고를 시사하는 장면을 보여주다가 'passion' 이라고 제목이 뜬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 마음이란 이 사고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혼을 기다릴 정도로 그 여자를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열정), 이혼하길 바라는 소유욕(질투), 친구들 앞에서 대놓고 발언하는 모습(무모함). 운명적으로 완벽히 끼어들지는 못 했으나 언제라도 끼어듦을 예고하는 이 남자의 발언이 내게 뜨겁고 순수하게 다가왔다. 단지 여자로서 한 남자의 무모함을 즐기는 감수성이 아니다. 사실은 우리들 마음 속엔 저마다의 열정과 무모함을 품고 있지만 다들 숨기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유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간의 마음 속에 열정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을 분출하게 만드는 것이 '광기' 이고, 대부분의 인간에겐 이 광기가 없는 채로 안정적이지만 이상이 부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언젠가는 이혼하기를 기다리며 사랑을 꿈꾼다는 것. 이 얼마나 꿈같고 이상적인가. 나는 작품을 절대로 도덕적으로 단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순간 예술성, 꿈이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작품은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 자신과 제대로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러한 불찰은 또 다시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다. 이 영화가 시사하는 의미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감추기만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조금 더 마음 속에 열정에 따라 솔직하게 타인과 나를 마주 한다면 어땠을까. 그것이 안정을 해치는 민망한 상황이 될지라도.
2. 샤워실에서 키스하는 장면
도모야는 가호와 약혼한 사이지만 그 날 모였던 친구 중 남몰래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타카코(우라베 후사코) 라는 여자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친구 타케시(시부카와 키요히코). 어느 날, 셋이서 타카코 집에서 모여 진실게임을 한다. 타카코는 말한다. 타카코는 아끼던 반려묘를 하늘 나라로 떠나보낸 상실을 앓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열정을 잃은 것 처럼 보인다. 대사에서도 느껴졌다.
" 나는 남자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어. 그냥 데이트하고 같이 밥 먹고 섹스할 수 있을 것 같으면 하는 거야. 그게 전부야."
그러자 갑자기 타케시는 그녀에게 화를 낸다.
" 넌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여기서 알 수 있다. 열정이란 때로 폭력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을. 타카코는 그의 분노를 받아들인다.
"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타케시는 타카코의 뺨을 때린다. 타카코도 그의 뺨을 때린다. 그러고는 갑자기 타케시가 타카코를 화장실로 끌고가 문을 잠그고 그녀를 벽으로 밀친다. 그리고는 샤워기에 물을 틀어 그녀의 얼굴에 들이 붓는다. 무자비하고 당혹스런 이 장면은 이렇게 해석되었다.
직접 흠뻑 젖어보아라.
마치 분수대에서 올라오는 물을 지켜보지만 말고 직접 들어가서 제대로 입안에 가득 물을 넣어보고 숨 넘어갈 듯 희열을 느끼는 순간 만큼은 굳어있는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열정을 되찾을 수 있듯이, 타케시는 타카코를 과감히 밀어붙히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샤워기 물을 맞으며 타케시는 타카코에게 키스를 퍼붓는다. 타카코는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이내 열정적으로 그의 키스에 응한다. 한편 밖에서 괭이를 들고 화장실을 쳐부술 각오를 다지고 있던 도모야는 화장실 창문으로 비치는 그들의 에로틱한 그림자를 바라볼 뿐이다.
3. 공장 단지에서 키스하는 장면
겐이치로와 가호가 공장단지에서 만나 걸으며 대화를 하는 장면도 있었다. 겐이치로는 타카코와 연인,친구 사이도 아니면서 섹스는 하는 애매한 관계를 이어오던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약혼한 가호를 사랑하는 남자. 겐이치로는 가호에게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둘은 굵은 연기가 뭉뚱뭉뚱 피어오르는 공장 단지 앞에서 서서히 가까워지면서 키스한다. 나는 이 장면이 좋았다. 바닷가도 유럽의 어느 거리도 아닌, 아무 멋 없는 그 공장 단지 앞, 두 남녀의 키스가 이토록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에서 뜨거운 환희를 느끼고 말았다. 평소에는 별 생각없이 바라봤던 공장 굴뚝의 구름같은 연기가 우리의 열정을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우리의 삶은 공장 지대처럼 지루하고 반복적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열정은 끝없이 태워지고 연기처럼 조용히 굴뚝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 가호는 그러고나서 겐이치로에게 거절 의사를 표한다. 그러나 그녀는 경직되고 수동적이었던 전과는 다르게 열정을 찾은 듯 행복해보인다.
4. 포스터 속 장면
가호가 겐이치로와의 키스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온다. 약혼남 도모야가 쇼파에 앉아있다. 도모야는 가호에게 이별을 고한다.
"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더이상 너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해."
가호가 묻는다.
" 그 여자는 너를 사랑한대?"
"아니."
" 그럼 내 옆에 있으면 되잖아. 뭐 하러 떠나가... "
" 내 마음 속에 다른 여자가 있는데 곁에 너를 둘 순 없어."
가호는 울먹이면서 말한다.
" 집에 오면서 생각했어. 이제 너에게 사랑받기 위해 변해야겠다고. 그런데 어쩌지? 늦어버렸네. 그렇지만 네가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 그러면 나도 받아들여야지. "
수동적이었던 인물 가호가 겐이치로에 의해 열정을 찾고 변화하기를 마음 먹었으나 도모야는 이별을 선고한다. 그리고 도모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린다. 여기서 끝인줄만 알았는데 몇 초 뒤에 갑자기 그가 다시 돌아온다.
미안해. 잘못 했어. 용서해줘."
다시 돌아온 도모야가 가호에게 용서를 빈다. 영원한 이별일 줄 알았으나 둘은 다시 이어진다. 사실 영화에서 도모야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몇 초지만, 이것을 우리 인생으로 가져와 본다면 하루, 한달, 몇 년 혹은 영원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단단히 이별을 말하지만 때로 다시 돌아갈 만큼 충동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별도, 사랑도 예측 불가한 생의 본질 앞에서 때론 잔인하게 때론 아름답게 자유로이 흘러간다는 것.
우리는 그 생의 본질 안에서 나름의 논리를 적용하려 들고 체념해보려 하지만, 뜻대로 되기 어렵다는 것을 이 작품은 말한다.
다시 돌아온 그들 대화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멕시코 여행 이야기였다. 둘은 멕시코가서 자전거 여행을 했었다.
가호가 말한다.
" 우리 멕시코 여행가서 자전거 탔을 때, 네가 내 앞으로 앞질러 가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는 거 너무 위험했어."
"나는 빠르게 앞으로 가면서도 뒤 쫓아오는 네가 걱정되서 그랬지."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엇갈렸던 진심을 말한다. 가호는 도모야보다 열정이 부족해서 뒤쳐졌지만 도모야를 걱정하는 마음이었고, 도모야는 늘 열정적으로 앞서가면서도 가호를 향해 뒤돌아보고 있었다는 것.
인간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형태이기에 고독을 고수할 수 밖에 없지만, 서로의 진심을 향해 다가가려는 의지(열정)은 오히려 그러한 불가능마저 아름답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