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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Apr 17. 2022

<숀 베이커_플로리다 프로젝트 비평>

문명화된 삶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욕하고, 침 뱉고, 구걸하고, 불까지 지르며 온갖 비행을 저지르는 꼬마 무니. 그런 무니의 엄마 핼렌도 철없고 방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스트립 댄서를 그만두고 식당에 취업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불법 방문 판매라도 해 보지만 또 실패. 끝내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매춘을 했다가 복지부 직원에게 적발돼 딸아이와 함께 하는 것조차 실패하는 시궁창 인생. 무니와 핼렌, 이들 모녀가 살아가는 곳은 당연하게도 빈민촌입니다. 디즈니랜드 관광객 유치를 위해 조성되었지만 하루 하루 근근히 살아가는 소외계층이 사는 모텔촌이죠.

영화는 내내 빈민촌을 누비며 소외되고 도태된 이들의 현실을 가로지르는 무니의 온갖 비행을 쫓아갑니다. 이런 무니 시각 속에 빈민촌의 세상은 언제나 재밌는 것이겠지만, 결국 범죄자의 말로가 그렇듯이 무늬는 복지부 직원에게 잡혀 엄마와 이별할 위기에 놓입니다.


이런 무니를 보며,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며 무엇을 느꼈나요? 사회의 사각지대에 대한 고발을 발견했나요? 이동진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영화는 세상을 구하는 법을, 해결책을 제시하는 않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중략.)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이 복잡한 사회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우리의 질문이 비로소 시작된다” 여러분은 이에 동의하시나요? 영화 내내 무니를 통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난 문제가 “복잡한 사회문제”에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화 내내 가장 강렬하게 등장한 문제는 ‘자유의 문제’였습니다. 방탕해서 더욱 순수성이 증명된 진정한 자유, 어떤 도덕도 어떤 사회의 가치관도 미래에 대한 성실성도 허락하지 않는 원초적 자유였습니다. 이러한 무늬의 자유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성실성도 없기에 위태롭습니다. 위태롭기에 이 원초적 자유는 더욱 짜릿합니다. 그리고 또 짜릿하기에 더욱 위태롭게 느껴집니다. 위태로움과 짜릿함의 팽팽한 긴장이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관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문제가 “복잡한 사회문제”였다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행복과 불행’이 대립하는 긴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에 불행은 마지막에만 나타납니다. 온갖 비행을 다 저지르고 나서야 무니의 울음이 터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화 내내 불행은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의 불행은 예고로서만 나타납니다. ‘저러다 결국 잘못 성장할 텐데, 인생이 망가질 텐데, 엄마랑 이별하게 될 텐데’ 등의 메래에 대한 걱정으로 나타납니다. ‘불행에 대한 예고’는 ‘불안’이며 위태로움입니다. 그리고 위태로움 앞에 행복은 아슬아슬해 짜릿합니다. 또한 그 행복이 어떤 도덕도 사회적 가치관도 거부하고 있다면 짜릿함은 더욱 커집니다. 결국,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긴장은 ‘행복과 불행’의 대립이 아닌,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불행’의 대립이며, ‘위태로움과 짜릿함’의 대립인 것입니다. 따라서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문제는 위태롭고도 짜릿한 원초적 ‘자유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서 말하는 원초적 자유의 말 그대로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자유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원초적 자유는 고양이가 잠시 후 토하게 될 것도 모른 채 나쁜 음식을 삼키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배탈 날 것을 상관하지 않고 잼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과도하게 먹어대는 것과 같은 수준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동물도 어린아이도 아니기 때문에 원초적 자유를 스스로에게서 박탈시킵니다. 지각이 있는 성숙한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무니와 같은 원초적 자유를 스스로에게서 박탈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원초적 자유의 박탈이 너무도 당연해 보이기에 박탈의 이유를 망각하곤 합니다. 우리는 원초적 자유대로 사는 것을 당연히 부도덕한 비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초적 자유는 뻔히 보이는 미래의 불행 때문에 버린 것이지 원초적 자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원초적 자유에 불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앞으로의 무니가 그리고 우리가 박탈당한 원초적 자유의 문제는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원초적 자유에는 사회적인 무엇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이들 원초적 자아가 언젠가는 사회적 자아에 의해 죽게 됩니다. 사람이 성숙하면 배 아플 것은 생각 안 하고 아이스크림만 먹는 원초적 자유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원초적 자아를 우리는 무니 통해 우리는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원초적 자아입니다. 그리고 적은 사회적 자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자아에 의해 곧 사라질 무니의 순수하며, 원초적인 자아를 아련하고 아슬아슬하게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니의 원초적 자아를 두고 사회적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결국 무니의 원초적 자아를 죽이겠다는 것이 됩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무니의 비행을 그치게 하며, 무니를 정상적인 가정으로 유인해 무니를 원초적 자유의 타락에서 구제하지 못해 안달 난 이들이 바로 무니의 죽일 적인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복잡한 사회문제로 해석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니가 원초적 자유로 방임되어 방탕하게 비행을 저지르는 것 복잡한 사회적 문제 중 하나로 본다면 그 시각은 무니의 원초적 자아가 죽기를 바라는 시각입니다. 즉, 영화내내 마음을 쏟고 응원했던 인물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무니에게 사회화된 자아는 도적주의자, 혹은 프로불편러에 해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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