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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YI NA Apr 07. 2023

오랜만에 독서 모임

일기


조혈 작용은 매우 중요하다.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과 같은 혈구를 형성하는 작용이니까 말이다. 근래의 나는 조혈 작용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은 피 같지 않은 가짜 혈액이나 다름없는 인간이었다. 그것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밀가루에 물을 넣고 적색 물감을 섞어서 만든 분장용 피라 해야 할까?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건 유익하고 즐겁기라도 하지, 난 그 보다도 훨씬 비어있고 쓸모 없었고 위험했다. 어느 것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위험한 법이다. 그러니까 즉 나는 백혈구나 혈소판이 다소 부족하여 몸에 위험한 징후를 일으킬 수 있는 무책임하고 무미건조한 피와 같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쓰는 글 마다 억지스럽고 마음에 차지 않아서 갖다 버리고, 그간 나 자신에 대해 남몰래 맹신해왔던 재능에 "불신" 이라는 가스라이팅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해 못 할 것이고 나보고 여전히 유치한 인간이라 폄하할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나는 죽고 싶었다. 정말이다. 글이 원하는 만큼 쓰여지지 않으면......  나는 죽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죽고 싶은 심정, 그 극한의 절망을 즐기는 나 자신이 어느 순간 출현하고 있다.


다들 이런 내가 철이 없고 어리광이라 한다. 그렇다. 그 말이 맞다. 내가 철이 들고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 인간이라면 조금 더 의연하게 삶을 능숙하고 만족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인간이라서 미안하다. 나보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기어코 이 온전한 삶을 불행하게 격하 시켜야지만이 직성이 풀리는 못난 인간이라서.


얼마전엔 도스토예프스키 독서 토론 모임에 나갔다. 나는 거기서 내 의견을 말했을 뿐인데 다들 감탄을 해줬다. 그런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성까지 갖춘 해석은 처음 들어본다, 전공자냐고 질문이 들어왔다. 나는 전공자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러자 어떤 남자가 과장일지 모를 발언을 했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감각을 타고 나신 거네요!  그러자 다른 남자가 말했다. 전공이랑 재능은 상관 없어요. 학구적인 거랑 재능이 있는 건 별개에요. 배운다고 재능이 생기는 건 아님. 제가 봤을 때, 님은 충분히 재능 있어요. 비평이든 소설이든 포기하지 말고 써봐요.


그리고 고등어 구이 집 가서 소주를 한 잔씩 했다. 분이 좋았던 탓일까? 그녀는 소주를 거리낌 없이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저 머나먼 달에서 퍼온 것일까? 싶을 만큼 달았고, 자신의 정신을 그 순간의 분위기와 유희에 알코올로 끝없이 휘발시키고 싶은 욕구에 달아올랐다. 술에 취한 그녀는 흥분해서 웃기도 하고 미친 소리를 짓거리기도 했다.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처량함에 기이한 이상주의가 깃들어 있는 것이 랍니다. 사랑받지 못 하는 어느 여인이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가 버린 담배 꽁초까지 주워서 간직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남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여자가 입술에 바르던 립스틱이 지겨워져서, 그 남자가 사준 립스틱임에도...  그 버려진 립스틱이라도 주워서 간직하고 싶을 만큼 간절한 남자도 있을 꺼에요.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건 처량함이지만, 객관성은 이미 중요치 않아요. 그건 절대적으로 사랑에 관한 열정이자 이상주의의 실현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매력적이고 기이한 여성이라 칭송받았다. 술에 취한 그녀는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매우 들떴다. 술에 쩔기만 하면 이상한 삶의 교훈이나 그것이 마치 대단한 철학이라도 되는 것 처럼 떠들어 댈 때 행복을 느끼기도 했었던 것이다. 평소엔 지 혼자 세상 덩그러니 남겨진 것 처럼 아무 말이 없지만...  그리고 그날 따라 술에 취해서 피부가 상기 되었음에도 화장이 무너지지 않은 사소한 기적까지 이루어서 문득 식당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외모에 남몰래 흡족해했다.


그리고는 만취해서 1시간 거리를 택시를 타고 집으로 기어들어왔다.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그런데 글이 또 써지지 않는다. 술기운에 써질 줄 알았는데...  그야말로 하수가 된 기분이다. 칭송받던 여왕에서 자살하고 싶은 지하생활자의 칙칙함을 닮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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