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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YI NA Sep 02. 2023

시절인연



           시절인연
                                     임이나


파리해진 거리를 지나 당신은
느릿느릿 꾸물꾸물 나에게 걸어온다

언젠가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회상하리라
몹시 흥분한 도시의 몽롱함에 합류했던
잊혀진 것들에 대하여

벽에 비친 보리수 나뭇잎들의 그림자
긴 발톱으로 저 멀리 떨어져가는 별들도
가로등 불빛 아래 맥주의 주황빛 냉기
희귀한 언어를 번역하는 능력자처럼,
너의 언어와 눈빛이 번역되던 나의 줄기찬 심장도

이제 그 몽롱함은 투명하게 용해되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복사본처럼
지구는 돌아간다
외로이 거리를 떠돌던 타잔과 아담은
맨발 끝으로 올라오는 회색빛 습진에 괴로워하며
이 폐허 속을 걸어간다

나는 그런 외로운 사내들의 어깨를 껴안는다
만물이 위태로이 하늘 거리는 지도 모르고


09 02 2023

처음으로 선물받았던 잉크병.

재활용에 버릴까 고민하다가 서재에 장식해두었다.

무심하게 일상적으로 가차없이 버리기엔

글을 쓰기위해 매일 뚜껑을 열었던 나의 기억들이,

바로 눈앞에서 그 물질이 사라지는 것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기억들의 두려움과 대치하고 있는 나의 일상성으로 점차 그 두려움이 스며들수록,

이 빈 병에 대한 애착은 사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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