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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YI NA May 29. 2022

우연과 상상(2021)

두번째 이야기에 대한 비평

 

  여자는 딸이 있는 가정주부였다. 그녀는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다른 학우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 했다. 그러면서 학교의 어떤 연하의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앵커 지망생이었는데 불어에서 낙제받아 취업에 문제가 생겨 교수를 원망했다. 그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서 생긴 결과임에도 그는 건방지게 점수를 주지 않은 교수 탓을 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제안했다. “내 인생만 망할 수 없으니 그 녀석의 인생도 망쳐달라고.” 사실 여자는 남자를 엄청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약간의 마음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남자의 요구대로 교수에게 찾아가서 유혹할 만한 행동을 한다.

교수는 유명세를 탄 작가였다. 여자는 그의 책에 일부에 나와있는 야한 장면을 일부러 그의 앞에서 읊는다. 그러면서 교수실의 문을 닫으려 한다. 그러나 교수는 절대로 문을 닫지 못 하게 한다. 문을 닫지 않는 것은 교수의 고집이었다. 왜 그는 그 고집을 놓지 못 하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의사가 간호사를 꼭 옆에 두고 환자와 대화를 나누려는 것과 비슷한 일이지 않을까? 자신이 가진 사회적 모습으로써 타인을 대하고 싶고, 그래야만 자신의 안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지혜로움에서 나온 고집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유혹하려는 여자를 향한 일종의 방어 수단인 것이다. 여자는 그럼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야한 장면 한 부분, 한 부분 충실히 읽어낸다.

유혹하려는 여자의 차분한 집요함, 문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교수가 여자한테서 느끼는 공포, 이것이 두번째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 강렬한 이유 중 하나일 것 이다. 그러나 오히려 유혹하려던 여자는 교수에게서 의외의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 다른 남자들에게선 욕망에 충실함에서 오는 자유분방함만을 느낄 뿐이었는데, 교수는 그녀가 가진 그 자유로움을 단순히 욕망의 의미에서가 아닌 ‘새로운 미지의 영역에 속하는 재능’이라 칭해주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추측건대, 그녀는 남편에게서 자신의 자의식을 일깨워줄 새로움을 느끼지 못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녀의 대사 대로 인생에 한 번 낼까 말까 한 큰 용기를 내어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려 한 것 인데, 이 미지의 영역에 속하는 특이한 여인은 학우들 사이에서도 섞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순진하게도

자신을 기만하는 행동인줄도 모르고 마음에 크게 없는 연하의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면서 일탈을 일삼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이 있었다. 단순히 일탈만을 일삼는 여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교수는 여자의 열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건 시시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교수에게 글로써만 존재하던 그의 욕망을 실질적으로 느끼게 해준 존재라는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자의식을 교수에게서 인정받고 인생을 살아갈 희망(실존)을 얻는다.


여기서 희망이라 칭한 것이 밝은 의미에서는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말그대로 희망인 것이다. 희망은 미지의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희망 고문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녀가 교수에게서 얻은 희망이 로맨스로 나아갈지 궁금했다. 그러나 서사는 Catastrophe를 택했다.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자 고문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자가 교수와 나눈 비밀 대화 음성 파일을 대학교 관리자에게 잘 못 보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녀와 교수에게는 희망은 사라져 버리고 고문만이남아버렸다. 교수는 거의 실종된 것 처럼 살아가고 여자는 이혼을 당했다.


5년 뒤, 퇴근 길 버스 안에서 남자와 마주친다. 여전히 남자는 거만하다. 그때 일이 자신의 잘 못이 아니라며 오히려 메일을 잘 못 보낸 여자의 아둔함을 조롱한다. 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인생의 비극적 나락을 맛 본 여자가 버스 창밖을 바라보는 파리해진 외로운 얼굴을. 남자는 그녀에게 일하고 있는 회사 명함을 달라고 한다. 외주로 맡겨야 하는 일을 주겠다고.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남자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바뀐 듯 여자는 갑자기 명함을 주고 남자에게 키스를 하고 내린다. 또 다른 로맨스의 시작인줄 알았건만, 이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미지의 영역에 속하 생기있그녀의 재능이 남자를 향한 복수로 뒤 바뀌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은유하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시시했던 삶을 살아왔던 늙은 교수의 글을 여자가 복수 해주려는 의지로써 읊은 것인데, 머릿 속으로만 존재하던 남자의 ‘상상’이 그녀의 재주로 ‘우연’히 그들 사이에 희망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우연’은 늘 변한다. 그것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이것이 우연의 본연적 성질인 것이다. 그렇기에 커다란 불행을 일으키키도 한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의 우연은 다시 복수를 지피는 ‘상상’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녀를 연민의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나는 오히려 여자가 부러웠다. 버스 안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대학을 졸업하고 교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교수와 대화를 할 때, 졸업하고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자, 그녀는 다시 주부로 살아가겠죠, 라고 말한 것과 비교해서 생각해보건대 나는 그녀의 삶이 오히려 본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보여졌다. 그렇다. 본연적 삶은 비극 한 가운데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교열 일을 한다는 것은 틀린 것을 바로 잡고 글을 다듬는 일이다. 이혼은 슬플지라도 인생은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열정을 지펴 복수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고(상상), 틀린 글자를 바로 고치는 것 처럼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며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삶 속에 무수히 많은 '우연'과 역동적으로 마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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