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있다는 건 온전치 못 하다는 것이고, 온전치 못한 것들은 영화나 문학에서 대부분 고독으로 은유된다. 프란츠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벌레로 변해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그레고리의 모습,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연민'에서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 생활을 하는 소녀, 두 인물 다 처절하게 사회에서 분리됨을 느낀다. 조제 또한 그러하다. 그녀가 늘 책을 주워다 읽고, 요리를 열심히 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신체적 결핍에 대해 정신적으로나마 채우려는 무의식적 행동들일 것이다.
고독하다는 건, 그 존재를 고립시키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조제를 가장 고립시키는 존재가 그녀의 할머니다. 할머니는 그녀의 장애를 수치스럽다고 느낀다. 그래서 밤에 산책을 하고, 최대한 담요로 손녀를 가리고서 다닌다.
영화는 츠네오가 담요에 숨어있던 조제와 조우하면서 시작된다. 츠네오는 맛있게 요리를 해주고,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된다. 결핍이 원인이었던 행동들이 한 남자에겐 매력으로 작용하면서 둘은 조금씩 마음이 이어지게 된다.
사실, 츠네오의 마음이 사랑인가. 사랑이 아닌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다리가 불편한 여자에 대한 연민으로 보여진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츠네오는 아무 여성과 섹스를 하는 남성이고, 조제를 사랑할 만큼 진지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의견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사랑'으로 결론 내리기로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랑에는 호기심과 연민 모든 것이 포함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츠네오가 아무 여성과 섹스를 하기 때문에 진지하지 않다는 말은 츠네오란 인물에게 윤리학적인 제재를 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학과 영화는 윤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므로 그 이유만으로 조제를 사랑할 수 없는 남자라는 전제는 동의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후속편을 찾으러 서점에 가기도 했고, 무엇보다 수레를 새로 고쳐서 조제를 할머니 몰래 세상 밖을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조제를 사랑했다고 믿는다.
이 세상은 호랑이처럼 무섭고, 나는 물고기같은 결핍을 지녔다.
조제에게 호랑이는 자극적이고 두려운 외부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물고기는 다리가 없는 자기 자신이다. 츠네오와의 사랑으로 조제는 호랑이처럼 무섭고 자극적인 세계를 바라볼 힘을 얻으려 한다. 또한 자신은 원래 살고 있던 최적의 환경, 즉 해저에서 헤엄쳐 나왔다. 사실, 난 여기서 조제의 이 말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조제를 해저에서 나오게 한 건 츠네오가 아닌가. 츠네오가 먼저 조제에게 다가갔고, 신기한 구름들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조제는 밖으로 나가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비로소 점차 내면의 원초적인 고독의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여기서 원초적인 고독이란, 원래부터 인간에게 주어져있는 고독을 의미한다. 사랑이나 외로움 그 어떤 감정도 허용되지 않는 자연적인 고독함 그 자체. 조제의 그 고독은 츠네오에 의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이자 시간으로 변모해버린다. 그러므로 조제에겐 이제 츠네오가 그 어두웠던 해저처럼 안정적인 세계다. 그래서 조제는 츠네오에게 요구한다. 자신의 결핍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달라고. 휠체어는 필요없어. 네가 업어줘. 라는 이 대사가 그 요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건 1차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인간적으로 힘이 드는 일이고, 좀 더 논리적으로 들어가보면 '나의 결핍과 타인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츠네오의 수레를 끌던 츠네오의 사랑은 식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제 뿐 아니라, 신체적 결함이 없는 인간도 이와같은 무리한 요구를 하는 실수를 때때로 한다. 상처받은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연민으로 감싸주길 바라고, 나는 늘 지치고 힘드니까 상대방이 나를 위해주는 건 당연하다고 여길 때가 있다. 인간이 망각하며 사는 것에 대해 조제라는 인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이 츠네오가 조제를 바닷가에서 업고 있는 장면이 아닐까.
인간은 사랑으로 인해 상실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영화에서 조제는 충분히 아기로 형상화 될 수 있다. 실제로 아기들이 태어나서 3개월 간은 자폐아적으로 타인 또한 자신과 같다고 인지한다. 엄마와 자신을 한 몸이라고 인지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기는 자신이 엄마와 한 몸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면서 불안감을 느끼고, 엄마에게 더 집착하게 된다.
조제도 이와 비슷하다. 깊은 해저에서 올라왔으나 자신은 늘 불안한 존재라 느끼기에 츠네오에게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더욱 더 받아주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츠네오가 떠나고, 영화에서 조제가 휠체어를 타고 유유히 장을 보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다시 태어난 조제다. 그러나 성장해야하는 주체를 떠나버리고 온 사람은 마음이 편치가 않다. 사랑 때문이다. 온전히 사랑하는 이의 결핍과 하나가 되지 못해 실패함에 대한 원통함.
사랑은 늘 두 사람의 불안함에서 온전한 하나로 나아가고 싶은 노력이니까. 이 영화가 의미를 갖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츠네오의 눈물에 가장 많은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사랑-이별-성장 이 단계의 구조는 많은 영화,소설에서 채택하는 보편적인 구조인데 비해 츠네오의 눈물은 성장해야 하는 주체의 입장에서가 아닌, 떠나보내는 자의 적나라한 감정과 사랑은 늘 불안정하기에 거기에서 느껴지는 고통스런 본질을 보여주기 있기 때문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