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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YI NA Jul 04. 2022

모래의 여자 비평 _ 아베코보

인생은 편도행 티켓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스는 신들을 농락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영원히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벌에 처하게 된다. 그는 이 바위가 떨어지면 계속해서 다시 올려야 했다. 모래의 여자 소설 속 남자도 시지프스와 매우 흡사한 상황에 처한다. 계속해서 모래만을 치워야 하는 인간 존엄성에 해악을 가하는 노동에 처해진 것이다.


 소설은 남자가 곤충채집을 하러 자신이 살던 도시에서 여행을 떠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곤충채집을 하는 이유는 희귀한 곤충을 잡아 그것으로 유명해져서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남기고 싶으려는 세속적 욕구다. 남자의 직업은 학교 교사였다. 그가 속하던 세계에 대해 묘사하는 것을 보면 비관적으로 얘기한다.

“실제로 선생들만큼 질투의 화신에게 매달리는 존재도 드물다. 학생들은 해마다 강물처럼 자기들을 타고 흘러가는데, 선생들만 그 흐름의 밑바닥 깊이 박혀 있는 돌멩이처럼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이기는 해도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를 쓰레기 같은 존재라 여기고 고독한 자학 취미에 빠지든지 아니면 타인의 알탈을 고발하는, 의심 많은 도덕군자가 된다. 자유로운 행동을 동경하는 나머지 자유로운 행동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로가 자유롭지 못 하기에 물고 뜯는 ‘정신적 약육강식의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 도덕적, 사회적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은 인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욕구를 분출하게 한다. 그 중 하나를 sns로 꼽는다. 비싸고 훌륭한 음식, 혹독한 다이어트 끝에 얻은 바디 프로필로 자신의 피드를 치장한다. 남자가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욕망도 현대인의 sns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보여졌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부조리는 너무도 익숙해서 우리에게 신선하지 않다. 이 익숙한 부조리를 깨부수고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충격적인 인식을 일깨워주는 것이 ‘모래의 세계’다.


곤충채집을 하러 갔다가 그는 모래의 부락에 갇히고 만다. 그 세계는 끊임없이 모래를 퍼올려야 하는 노동을 강요한다. 치우지 않으면 모래에 의해 집이 압사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급작스런 노동 강요에 굴복할 수 없는 남자는 반항해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남자는 그 곳 관리자에게 호소한다. 자신은 이렇게 모래만 치우고 있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선생이고 주민등록증이 있는 시민이라고. 이 강제적이고 단순한 노동은 인간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행위이며 단지 곤충채집을 하러 왔을 뿐이라고. 그러나 부락 관리자는 남자의 호소에 비웃음을 보일 뿐이다. 이 비웃음으로부터 남자의 호소가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곤충을 잡아서 이름을 남겨봤자 그 순간의 쾌락일 뿐, 온전한 자유함을 보장 받을 수 없다. 피상적 sns활동에 회의를 느끼는 것 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원래 속하던 세계에서도 욕구 불만족을 느껴 모래 사구까지 떠나온 사실을 비추어 봤을 때, 그의 존재는 어디에도 제대로 정착할 수 없는 것이다. 서사에서 모래의 상태는 남자의 의식상태를 반영한다.


“모래의 불모성은 흔히 말하듯 건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일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았다. 일년 내내 매달려 있기만을 강요하는 현실의 답답함에 비하면 이 얼마나 신선한가. 물론 모래는 생존에 적합지 않다. 그렇다면 정착은 과연 생존에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것인가. 정착을 부득불 고집하기 때문에 저 끔찍스런 경쟁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정착을 포기하고 모래의 유동에 몸을 맡긴다면 경쟁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마음속으로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그는 간혹 자기 자신이 유동을 시작한 듯한 착각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대립


이런 남자를 잡아두려는 존재가 여자다. 여자는 이 부락에서 홀로 노동을 하며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녀는 겉으로는 얌전하고 착해보인다. 그러나 일이 혼자서는 힘들다는 이유로 민박하러 온 남자를 속이고 잡아둔다. 여자는 이중적인 존재다. 겉으로는 수동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완전히 수동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남자를 잡아두려는 것은 보편적인 행위를 벗어난 이기성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래를 치우는 일에 순종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남자의 관점에서 순종인 것이다. 그 절대적 노동에 응하는 것이 그녀가 가진 생명력인 것이다. 그리고 모래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절망하는 남자를 위해 따뜻한 물로 손으로 애무해가며 씻겨주는 의식 행위를 발휘하여 남자를 적응 시키려는 눈치를 발휘하기도 한다. 게다가 남자가 이 곳의 모래는 판매될 수 있는 좋은 모래가 아니라고 하자 여자는 그런 것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팔면 그만이라고 분노한다. 여자는 모래의 세계 외에는 무지하고 이기성을 지닌 여자다. 그렇기에 모래를 향한 여자의 관점은 남자와 대립한다.


여자:여기서 나간다고 해서 금방 생활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남자:다를 게 뭐가 있어. 여기 있는다고 해서 어느 누가 생활다운 생활을 하고 있지?
여자:하지만 모래가 있으니까……
남자:모래라고? 모래가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야? 죽도록 고생하는 거외에 한푼이라도 도움 되는 게 있냐고?
여자:그게 아니고 팔아요. 공사장 같은 데 겠죠…… 콘크리트에 섞어야 하니까……
남자:웃기는 소리 마! 이렇게 소금기가 많은 모래를 시멘트에 섞는다? 이거 큰일 낼 사람들이로군. 위반이야. 공사 규칙 같은 거에……
여자: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 남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

여자는 모래가 있기에 생활 다운 생활, 즉 인생을 이어가는 중요한 매개체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노동적인 의미를 떠나서 그녀에게 모래는 사회적 존재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모래를 여기는 관점에서의 대립은 여자를 남자에게 있어 구속적 존재로 만든다. 이 해석은 현실에도 충분히 반영될 수 있다. 남자와 여자, 성별을 떠나서 삶은 ‘지키려는 자’와 ‘벗어나고 싶은 자’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와닿는 것은 전체주의와 개인주의의 대립일 것이다. 모래의 여자를 현실적인 인물로 형상화해보자면 어머니, 아내와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자식에게 세속적으로 안정된 삶에 편입될 것을 늘 가르치는 어머니, 가정을 지키려는 아내. (물론 이는 아버지 혹은 남편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그러나 안정된 삶, 가정이라는 테두리 속에서도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유에 대한 욕망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살아간다. 모래의 여자는 그 자유하고 싶은 남자를 함께 노동하는 주체, 부락을 지켜나가는 애향정신의 실현자로서 부락(집단)에 편입시키고 싶은 것이고, 남자는 개인주의로서 자유를 찾으려 그토록 도주를 도모하는 것이다.


한편 남자는 욕망을 달래기 위해 여자를 성적으로도 대한다. 여기서도 둘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성관계를 요구했다. 이에 여자는 ‘도시 여자들은 다 예쁘겠죠?’ 라는 질문을 하더니, 낭만없이는 관계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인다. 여자는 도시에 존재하는 로맨스에 대한 이상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그 이상향을 철없다고 평한다. 로맨스 없이는 관계할 수 없다는 여자의 이 이상향이 매우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 인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적 남녀 관계에서도 말이다. 이러한 이샹향으로 인해 정신적 강간이 성립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 정신적 강간이란 무엇인가. 구속 그리고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로맨스에 대한 환상이 구속과 결혼이란 행위를 행하게 한다. 그리고 이로인해 사회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남자는 차라리 쿨하게 여자가 관계에 응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은 정신적 성병환자’ 라고 비난한다. 이 비난은 남자를 정신적으로도 여자의 로맨스, 이상향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의 실패에 대한 응수다.


“정신적인 성병환자라…… 제법 멋진 말을 생각해 냈군. 하지만 그 말이 얼마나 내게 상처를 주었는지 그녀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우선 성병은 멜로드라마 하고는 정 반대다. 멜로드라마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절망적인 병이다…… 콜럼버스가 보잘 것 없는 배를 타고 보잘 것 없는 항구에 슬며시 반입한 것을, 모두들 열심히 나누어 온 세상에 퍼뜨렸다…… 인류가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죽음과 성병에 한해서인지도 모른다…… 성병은 인류가 연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절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너는 거울 저편에 있는 자기를 주역으로 한 너만의 이야기에 틀어박혀 있다. 나 혼자만 정신적인 성병을 앓으면서 거울 이편에 남아 있다…… 그러니까 나의 손가락은 모자 없이는 시들어 아무 쓸모가 없다…… 너의 거울이, 나를 불능으로 만들어버린다…… 여자의 철없음이 남자를 여자의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남자는 철저히 성에 대해 염세적이고 물성으로서 대한다.


“욕망을 채운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육체를 빌린 전혀 별개의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성이란 원래, 개개의 육체가 아니라 종의 관할 하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역할을 끝낸 개체는 재빨리 자기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한 것만이 충족으로…… 슬퍼하는 것은 절망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죽음의 자리로…… 이런 속임수를 야성의 사랑이니 뭐니 하고 뻔뻔스럽게 잘도 갖다 붙였다…… 정액권용 성과 비교하여 과연 어딘가에 쓸모있는 점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여자와 관계를 맺었음에도 남자는 성에 대해 회의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남자는 성에도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성욕을 채운 다음에야 다양한 성의 맛을 보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이라고 한다. 남자는 여자의 로맨스적 허영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분노를 느끼는 것으로 보여졌다. 그는 스스로가 그어놓은 원 안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 대한 강한 의구심 때문에. 앞서 말했듯이 모래의 세계는 허구일지라도 이 세계가 내포하고 있는 구속성은 허구라고 할 수 없기에 남자가 부리는 위악, 둘의 대립도 현실 세계에서 흔히 보여지는 모습들이다. 현재 실제 사회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 방어적이다. 다들 자기가 그어놓은 선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대립의 근본적 이유는 각자가 추구하는 욕망의 형태가 다르기에 거기에서 오는 불안감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둘의 대립이 조금 완화되는 부분이 있는데, 둘 다 라디오를 사고 싶어하는 순간이다. 라디오를 사기 위해 남자도 여자를 따라 열심히 일을 도운다. 라디오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다르지만, 같은 목적을 향해 삶을 일궈나가는 모습이 남자의 방어적 태도를 일시적으로나마 누그러뜨린게 아닌가 싶다. 여자가 자궁외 임신 의심 진단을 받고 부락에서 떠나 병원으로 이송되는 때, 남자가 라디오에서 카랑카랑 들리는 소리에 눈물을 짓는 이유도 그 라디오에서 그녀가 느껴졌기 때문이고, 거기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건 함께 같은 목적을 향해 열심히 살았던 삶의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리.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여자가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에 남자는 극적으로 도주 시도를 한다. 그러나 부락 관리자들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고 만다. 지난 몇 년간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는 건 과장이 아니었다. 인간의 힘으로 결코 떠나갈 수 없는 사구였던 것이다. 실패로 인해 허탈해진 남자는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여 까마귀 잡는 장치를 설치한다. 까마귀를 잡아서 다리에 실종 되었다는 문구를 적어 날려보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곳엔 의외의 것이 생긴다. 바로 ‘물’이었다. 모래를 치우는 노동을 해야만이 얻을 수 있는 그 귀한 ‘물’이었다.


 ‘희망’을 적었는데 ‘물’ 생겨났다. 얼핏 읽으면 아베코보는 남자에게 말 그대로 희망을 부여해준 것이라 해석될 여지가 크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기만이다. 삶에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모성에 대해 깨달았을 때, 우린 좀 더 자신의 삶을 예민하게 자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까마귀로 인해 구조를 받는 것은 ‘구원’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인간의 힘으로 더이상 저항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종의 구원을 갈망하는 의식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생겨난 ‘물’은 무엇인가. ‘물’은 남자가 그토록 갈망하는 고향으로 데려다 주지 못 한다. 그러나 ‘물’은 모래의 세계에 더욱 편입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질인 것이다. 결국 모래에서 물이 얻어진 것은 인간은 이 부조리에서 쉽사리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인간은 남자의 행위처럼 구조(구원)을 바라지만, 생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은 결국 ‘부조리’ 라는 것이다.


결말에서 남자는 실종 사건으로 마무리 된다. 이 결말은 인간에게 그러한 ‘구원’ 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도망치듯 살아가야 하는 편도행 티켓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끝까지 왕복행 티켓을 생각한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 하다.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또한 남자는 모래에서 찾은 물을 자랑하고픈 욕구를 가진다. 이 욕구를 가진다는 것은 그가 가진 정신적 결핍을 채우는 행위이므로, 그가 모래의 세계에게 더욱 더 편입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희망은 우리에게 기만적이다. 이 기만에 늘 사로잡혀 있기에 편도행 티켓은 두렵다.


그래서 그 나약함에서 나온 관념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왕복행 티켓’인 것이다.

.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소설 가장 앞 부분에 나와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남자가 결국 모래의 세계에 완전히 편입되어 버렸다는 결말과 결부된다. ‘벌’이 의미하는 것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악,공포,구속성 이라면 인생이란 거기에서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망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 자유와 희망은 없다. 그것은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재미’다. 도망하는 행위가 공포가 아니라 물을 찾아냈을 때 가졌던 의외의 기쁨처럼 부조리에 ‘재미’를 느끼는 순간, 삶을 본연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자는 단순히 모래에 순응할 뿐이었기에 부조리에 제대로 맞섰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남자는 다르다. 끊임없이 자기 안에 존재하는 이상향에 대한 의식을 잊지 않고 부조리에 대항했기에 본연적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와 희망은 늘 그렇게 이상으로서 존재하지만 재미는 우리에게 실존하고 있다는 쾌락을 준다. 역설적으로 희망과 자유가 없는 삶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하나의 예술이요, 쾌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재미란 단순히 물질적으로 욕구를 충족하는 행위, 자기 과시에서 오는 쾌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가 늘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의식을 잊지 않는 것 처럼,


 늘 자신 안에 깊이 존재하는 이상향을 잊지않고 실현해보이려는 불굴의 인간에게 주어진 ‘재미’ 인 것임을 정확히 말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삶에 주어진 부조리를 가장 예민하게 느낄 줄 아는 자야말로 재미있는 삶을 살아갈 능력을 가진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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