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독을 자처한 한 남자가 있다. 전 연인은 그를 원망한다. 자신을 두고 떠나간 그 남자를 관념 속에만 갇혀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에게 말한다. 당신이야말로 모든 것을 쉽게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고는 단절된 채 남자는 다시 수행에 돌입한다. 공간은 서울에 어느 복도식 아파트. 그는 백팔배를 하기도 하고, 산책을 하고, 불교에 관한 책도 읽는다. 이 수행 장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자가 가시같은 나무사이를 헤집고 들어간 곳에 어느 나무 위에 존재했던 새빨간 꽃과의 조우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다시 책을 펼친다. 그 책에는 대략 이런 글귀가 있다. 불타는 나무는 물 한 모금 없이 새빨간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다는 내용의 시. 그 빨간 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가 그토록 구하고자 하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이란 죽음과 맞닿아 있기에 매우 두려운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스스로를 없을 무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이러한 인간에게 평화와 고요는 단순 치장에 불과하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죽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꽃 대신 새빨간 블라우스를 입은 처녀귀신 비스무레한 여자의 형상으로 나타나 그를 괴롭게 한다. 백팔배를 할 때도 책을 읽을 때에도.
한 여자가 있다. (위에서 등장한 빨간 블라우스 입은 무서운 여자와 동일 인물. ) 그녀는 만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다. 마감을 앞둔 시기, 창작의 고통을 겪고 있는 와중에 옛 연인으로부터 와있던 연애편지를 발견하고는 라이터 불에 태워버린다. 이미 옛 남자가 바라보았던 자기 자신은 없다면서. 그러나 과감해보이는 그녀에게도 옛 연인말고 잊지 못 하는 남자가 있다. 프랑스 니스 해변가에서 우연히 찍힌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 여자의 카메라에 바다를 즐기던 남자의 죽음이 담겼다. 그 기억은 여자에게 인간의 생과 멸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을 준다. 그러나 여자는 멸, 즉 end가 두려운 사람이다. 오래전부터 영화나 소설이 결론이 지어지는 것이 서사가 죽어버린다는 느낌이 들기에 기피하고 싶어했다. 여기서 두 남녀 주인공의 공통점이 찾아진다. 끝을 두려워 한다는 것. 그리고 남자가 깨달음을 구하듯이, 여자 또한 영감을 갈망한다는 것.
한편 여자는 니스해변에서 죽어버린 검은 남자와 아주 비슷한 남자를 아파트에서 마주치게 된다. 작년에 불이 나서 죽어버린 줄만 알았던 남자는 알고보니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것에 영감을 얻어 여자는 자신이 니스해변에서 봤던 검은 맨을 창조하자는 의지에 도달한다. 이때, 애니메이션으로 형상화된다. 여자는 마치 출산하는 자세를 취하듯이 누워있고 남자는 여자의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영화에서 뚜렷이 드러나진 않지만, 이 남자는 주연 남자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두 사람이 계속해서 교차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이 이렇게 영감을 주어서 생하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야릇하고 짜릿하다.
남자는 죽기전에 깨달음을 얻고 싶어했다. 그는 죽음이 존재하고마는 생에 묘미를 잃어버린 듯이 보인다. 사귀었던 여자도 남자와 성향이 맞지 않았다. 자꾸 쉽게 쉽게 남들처럼 살라고 하니까. 사랑조차 의미를 못 찾던 남자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여자가 결국 잊지못하는 니스 해변 사나이가 주연 남자의 상징으로 결부되기 때문이다. 해변 사나이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파트 남자와 연결지어 지고. 결국 세 남자는 하나다.
수행을 거듭해 남자가 깨달음을 얻어갈수록 여자의 형상은 점점 무서운 귀신이 아니라, 원래 여자의 모습으로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참고로 영화 속에서 둘은 모르는 사이다. 다만 구하고자는 깨달음의 형상과 닮아있어 서로가 상징성을 지닌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는 온전히 아름다운 그녀와 마주하게 된다. 새빨간 블라우스를 입은 아름다운 그녀. 두 사람의 키스를 암시하며 서사는 end를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시기가 작년 겨울이었다. 그때보다 두번째 봤을 때, 훨씬 감흥이 컸다. 당시엔 관념적으로만 느껴지던 이 영화가 결국엔 서로 조우하지는 않으면서, 이상향을 갈구하는 뜨거움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남자에게 깨달음(여자)이란 결국 죽음을 의미하기에 아마 그는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작품 속엔 새롭게 창조되어 있으리. 그러니, 남자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
여기서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인간을 결국 자유롭게 하는 것은 정신적 이상향의 끊임없는 갈구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 결론을 거대한 상징으로 품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end 라는 것에 대해 끝은 끝이기도 하고 끝이 아니기도 하다는 자유라는 광기를 우리에게 던진다.
대한극장 불교영화제 관람.
*영화 보자마자 순간의 느낌을 휘갈겨 쓴 것이니 투박한 글일이지라도 이해 부탁합니다. 이 영화는 중간 중간 남자가 얻는 깨달음에 관한 문구가 인상적이기에 직접 관람 해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