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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Aug 29. 2022

잉마르 베리만 <페르소나 1966> 비평

나약하고 죄의식에 가득한 인간의 어두운 이면에 대하여


   아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혐오했던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의 직업은 배우. 어느 날 엘렉트라(그리스 신화 속 인물)를 연기하다가 실어증에 걸리게 되고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여자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이런 엘리자베스를 위해 배정된 간호사가 있었으니 그녀가 알마다. 그러나 알마는 엘리자베스를 맡기를 주저한다. 그 이유는 그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정신적 강인함’ 때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병원에서 별도로 그녀에 대해 검사를 실시한 결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침묵을 일관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자신으로서는 돌보기 힘든 환자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그녀에게 별 다른 답변없이 돌보도록 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와 알마, 두 사람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병원이 아닌 여름 별장을 떠나있도록 지시를 받는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가식적인 페르소나를 견디기 힘들 때는 때로 지겹도록 그 침묵을 일관해보라고 한다. 지칠 때 까지.


  그리하여 둘은 의사의 별장으로 떠난다. 언뜻 보기에 이 영화는 엘리자베스라는 배우가 일종의 치유를 위해 간호사의 간병을 받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알마는 엘리자베스의 자아 분열의 한 표상이다. 먼저,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웠고 촉망 받는 배우였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체면 즉, 페르소나를 중히 여기는 그 여자는 어느 날 사람들의 험담을 듣게 된다. 그녀의 연기는 훌륭하지만 모성애는 부족해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듣고 그 여자는 무리하게 임신을 한다. 그러나 점점 배가 불러올 수록 그녀는 뱃 속에 아들이 죽어버리길 바란다. 양육 때문에 자신의 연기 인생이 단절될 생각을 하니 그녀는 한 없이 우울해졌다. 그러나 아들은 깩깩 울면서 아주 건강히 태어난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인간이 모든 험담에 반응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모성애에 집착한 것일까? 충분히 자신의 커리어에 영향이 올 것이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임신을 자처한 것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그녀의 품성 자체가 정신적 고결함에 대해 매우 이상주의적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완벽주의자 라는 것이다. 모성애는 여자가 가진 정신적 고결함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희망찬 어머니이자 배우로서의 페르소나에 대한 욕망을 품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세계는 그것을 허락치 않았다. 염소처럼 축축히 눈을 뜬 아들과 마주보고만 있어도 두 사람 사이에는 남보다 더한 냉랭한 공기가 존재했다. 결국 그 여자는 아들을 친척에게 보내고 만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아들이 이상하게도 엄마의 사랑에 집착했던 것이다. 여자는 아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은데 아들은 자꾸만 그 축축한 눈으로 엄마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다가가려 했다. 그러다 엘렉트라라는 역할을 연기하다가 입을 다물게 된 것이다. 여기서 엘렉트라라는 신화 속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엘렉트라는 내연남과 모의해서 남편을 죽이려고 한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품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즉 아들 때문에 정신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엘리자베스에게 반대되는 인물을 연기하려니, 결국 그녀의 정신은 분열을 시도하게 된다. 그것이 입을 다물고 정신 병원으로의 도피인 것이다.


  알마가 엘리자베스가 현실에서 겪는 환멸감에서 기인한 인물인 탓일까? 알마는 엘리자베스와는 반대의 성향을 지닌다. 그녀는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 다섯은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꿈꾼다. 그리고 복잡한 내면의 성향을 지닌 엘리자베스와는 다르게 와일드하면서도 진취적이고 밝다. 엘리자베스와 있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그 중 두드러지는 것은 바닷가에서의 난교 섹스 경험이다. 바닷가에서 자신의 친구와 나체로 일광욕을 즐기다가 초면인 남성 2명과 성관계를 경험한다. 그녀는 바닷가에서의 황홀감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그 남자가 내 안에 사정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고.’ 그러고 나서 아무 일 없이 남편과 섹스를 했으나 그 정사 만큼 쾌락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엘리자베스가 그간 남편에게 느꼈던 권태감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엘리자베스는 아들 뿐 아니라 남편도 싫어했다.


  그래서 남편이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도 직접 별장에 찾아왔을 때 조차 대면하기를 꺼려한다. 알마가 그녀의 환멸감에서 기인한 환상적 존재라는 증거는 남편이 찾아왔을 때 알마가 엘리자베스 대신 남편을 껴안고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형상이 아님에도 알마를 껴안고 아내로 여기고 사랑스러워 한다. 알마는 아들 걱정을 하고 선물을 주고 싶어한다. 아주 보편적이고 따스한 모성애를 남편에게 어필한다. 이 장면이 참 기묘한 것이 두 사람이 누워서 껴안고 사랑하는 와중에 엘리자베스는 아예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존재감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점점 알마라는 페르소나가 강해져서 엘리자베스 본연의 자아와의 충돌에서 이기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순조롭진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적절히 알마로서 스스로의 분출되지 못한 욕구를 드러냈을 때 까진 아직 자신의 자아가 살아있기에 알마를 떨쳐낼 의지가 존재했다. 그래서 박사님께 이렇게 편지를 쓴다.

“알마가 나를 자극적인 방식으로 망치려 하네요. 어쨋든 나도 알마가 좋아요. 알마를 연구하는게 재미있어요.”

이 편지 내용은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돌봐준 알마에 대한 배신으로 보여질 수 있으나 사실은 엘리자베스가 점점 치유되어가며 알마를 떨쳐내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 편지를 읽은 바로 다음 장면이 알마가 늪에 비친 자신의 오롯이 존재하는 모습을 들여다 보고 있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다.


 처음엔 치유의 목적으로서 분열되었던 이 자아는 한낱 일시적 페르소나로 남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사라지고 마니까. 그러나 그러면서도 스스로 혼란을 겪는다. 그에 대한 증거가 그녀가 엘리자베스를 상대로 마주보고 앉아서 과거에 그녀가 아들을 싫어하면서 품었던 옳지 못 했던 매정했던 모성에 대해 냉엄하게 질책하는 장면에서 거의 나약해진 엘리자베스를 지배할 수 있는 정점에 이르렀을 때, 알마가 외친다. ‘아아 아니에요! 난 단지 당신을 도와주러 왔을 뿐이에요’


  그러나 서사의 결론은 마지막에 별장을 나설 때 알마만이 버스를 타고 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알마 혼자서 짐을 챙기고 나가는데 엘렉트라 비슷한 여성 동상이 완전히 헐어서 쓰려져 가는 것을 확대해서 보여준다. 이것은 엘리자베스 본연의 정신은 쇠퇴했고 새로운 페르소나가 이전에 낡은 페르소나를 전복했음을 의미한다. 엘리자베스 남편이 편지에서도 그렇고 실제 만나서도 버릇 처럼 언급했던 말이 있다. ‘사랑이란 서로를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바라보아야 한다고.’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이 연민을 요구하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굉장히 거부감을 보였는데, 알마는 그 연민을 능숙하게 잘 받아들였던 여자다. 이제 엘리자베스는 가고 알마라는 여자의 새로운 자아가 탄생한 것이다. 나약한 엘리자베스의 인생을 알마가 훔친 것 처럼 보여서 비극으로 보이지만, 이는 비극을 가장한 희극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약하고 위선적인 페르소나(엘리자베스)를 분열된 페르소나(알마)가 파멸시켜버렸다는 것이니까. 


이 영화는 인간의 페르소나에 대해 대단히 실험적으로 다룬다. 자연에 약육강식이 존재하듯이 인간의 정신도 그 법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한편의 꿈처럼 드러나고 있다. 즉 정신적으로 진보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나약하고 죄의식에 가득한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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