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세상. 내가 선택한 세상.
거실, 다이닝룸, 부엌, 방 2, 화장실 1
아버지의 회사에서 제공해 준 독일 집은 가구가 딸린 평범하디 평범한 독일 집이었다. 독일에서는 세입자에게 세를 줄 때 가구를 함께 제공하는 경우가 있는데, 평생 거주할 계획이 없는 유학생이나 직장인에게는 이렇게 가구가 있는 집이 실용적이다.
타지에 도착하자마자 편히 누워 잘 수 있는 침대와 식사를 할 수 있는 식탁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인 일이었다. 우리 가족처럼 평생 거주할 계획이 없는 사람들에겐 가구 딸린 집이 안성맞춤이었고, 그 덕에 우리 가족은 가구가 없어서 고생할 일이 전혀 없었다.
이사하기 전 우리는 집에 독일 고가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내심 기대를 품고 있었다. 거실에는 독일 전통 맥줏집에 있을 법한 짙은 밤색의 커다랗고 투박한 장식장과 갈색 가죽 소파, 그리고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대리석 소파 테이블이 있었다.
다이닝룸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사이즈를 확장할 수 있는 식탁이, 부엌에는 냉장고와 난생처음 보는 인덕션과 오븐, 식기세척기 같은 것들이 있었다.
부모님은 붙박이장이 있는 작은 방을 사용하셨고, 나는 붙박이장과 책상 그리고 두 개의 싱글 침대가 있는 부모님 침실의 두배 가량 정도 되는 방을 사용하게 됐다. 그 방에는 커다란 창이 나있었는데, 나는 종종 창가에 앉아 집 앞 풍경과 하늘 위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곤 했다. 난생처음 거실처럼 큰 방을 사용하게 된 나는 매우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처음에는 편리했던 가구들이 고가구임을 확인하듯 연식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쾅!
처음으로 연식을 드러낸 것은 나를 놀라게 한 침대였다. 깊이 잠들어 있던 새벽,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허리가 뒤로 꺾이는 경험을 했다. 침대의 갈빗살이 가라앉으면서 매트리스가 꺼진 것이었다.
와르르
하루는 붙박이 책장에서 책장의 나무판과 책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교과서가 쌓이면서 책을 지탱하지 못하고 책장의 나무판과 고정나사가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오래된 가구인지라 이미 나사를 고정시킬 수 없을 정도로 구멍이 커져있었고 나무판이 뒤틀려 안전하게 책을 진열하는 것은 어려웠다.
붙박이장도 마찬가지였다. 경첩이 고장 나 문이 떨어져 내리기 일쑤였다. 너무 오래된 가구라 고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이대로 생활하기엔 너무 위험했기에 붙박이 가구를 철거해야 할 것 같다고 집주인에게 이야기했지만, 철거를 해도 좋으나 이사를 갈 때에는 원위치로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책장의 맨 아랫 칸에만 책을 보관했다. 다행히 침대는 두 개였으니 다른 침대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내게 보상을 하고 싶으셨던 것인지 높이와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커다란 제도용 책상을 사주셨다. 하지만 책상까지 방에 들어오니 방이 가득 차 그 넓은 방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채우는 기쁨을 느끼고 그 뒤에 비우는 즐거움을 느끼지만 나는 반대로 채우는 기쁨보다 비움을 향한 갈망을 먼저 느꼈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고장 난 가구가 불만족스럽고, 복잡한 방의 모습에 답답해질 때가 많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그 대신 나는 숙제를 마치고 커다란 창문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있는 따땃하게 틀어진 라디에이터 틈 사이에 발가락을 끼우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푸른 하늘을 구름이 가로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풍경을 보며 한국의 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작은 클레멘타인을 배 위에 얹어두고 손가락이 누래질 때까지 야무지게 까먹다가 잠들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을 비스듬히 열어두었는데, 열린 창문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축축하고 신선한 독일 공기가 들어왔다. 거기에 라디에이터가 발을 따뜻하게 데워주니 아무리 우중충한 날에도 평온하게 스르르 잠들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어린 시절 빗소리의 즐거움과 축축한 공기의 차분함, 집안 온기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고가구가 준 추억 덕에 지금의 나는 고장 난 물건을 보면 미루지 않고 뚝딱뚝딱 고쳐낸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어린 시절 고장 난 가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불편했지만 잊어버리는 법도 배울 수 있었다. 방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고장 난 물건 투성이, 가구로 빽빽해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 물건들을 뒤로하고 앉으면 창밖에 멋진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반은 고물상, 반은 천국 같은 방 안에서 나는 천국을 선택했다. 내가 시선을 두기로 결정한 나의 세상은 아름다운 창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