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누가 지도하는가
찜통더위 속에 아이와 함께 바닥분수로 향했다. 대학강사 6개월 차, 꿀 같은 첫 방학을 맞이해 맞이해 생후 15개월 된 아이와 죄책감 느끼지 않고 마음껏 놀아주고 있다. 하지만 본업을 놓을 수는 없어 아이가 잠들 때면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좋을지 사부작사부작 교수법 연구를 하고 있다. 다른 학생들을 경쟁자로 느끼다 보니 수업 시간을 즐기기보다는 점수에만 연연하는 학생들이 보였는데, 학습 효과를 높이되 그런 경직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완화해보고 싶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며칠 전 한 교사의 자살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갑과 을의 관계. 그렇게 적당함을 모르는 학부모의 태도는 내게도 공포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대학이 초등학교처럼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갓 '선생님' 소리를 듣기 시작한 나에게 그 일이 왠지 모르게 남의 이야기 같지 않게 들렸고 왠지 모를 찜찜함 속에 학생들의 과제를 줄여야 하는지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대학에도 학부모의 전화가 심심치 않게 걸려오므로.
아이와 방문한 바닥분수에는 연령대가 다양한 아이들이 모여 놀고 있었다. 바닥분수는 이곳에 모인 갓난아기부터 초등학생정도 되는 아이들, 임산부, 어른들을 위한 모두의 것이었다. 물놀이용품을 풀장착한 아이들부터 지나가다 들른 듯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보였다.
아이에게 물놀이를 시켜주려는데 갑자기 거센 물줄기가 얼굴에 날아와 꽂혔다. 초등학생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 둘이 분수대를 발로 밟아 물총을 만들어 무작위로 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것이 재미있었는지, 분수대를 옮겨 다니며 거센 물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이 약하게 나올 때는 괜찮았지만 수압이 점차 세질 때가 문제였다. 거센 물줄기가 가늘어져 압력이 세졌고 불규칙하게 이리저리 쏘아지는 나머지 어린아이들부터 하나둘씩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 불편했는데 괜히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흥을 깨는 것일 수도 있고 내가 꼰대 같을까 싶어 멀찌감치 조심히 물러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과 함께 온 또래의 몇몇 아이들도 물줄기가 너무 세고 지나치다 느껴졌는지 “이제 그만 좀 밟으면 안 돼?”라고 계속해 물었다. 하지만 짓궂은 아이들은 재미있었는지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멈추지 않았다. 어느 정도가 적당한 장난인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누군가가 다칠 것 같은데?’
공공장소에선 공중도덕을 지켜야 하며 특히 안전을 위해서라면 지도가 필요했다. 아이들에게 조심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의 몫이 아니다.
부모가 나의 말을 아동학대라고 생각해 문제 삼는다면 내 커리어에 타격이 되지 않겠는가?
주변을 둘러보며 보호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특별히 지도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적당히 이야기를 해보아도 괜찮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놀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하면 그만이다.
어린아이들과 보호자는 하나둘 그 자리를 떠나갔고, 나도 아이와 함께 그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안전에 대해 이야기해봐야 문제가 되었을 경우 나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집으로 오는 길, 이런 일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조차도 초중고 교사도 아님에도 위험하다는 말 한마디 못해 움츠러드는데, 현직 교사는 매일이 살얼음판 아닐까.
사실 TV에서 보이는 안 좋은 유형의 부모보다 아무런 문제 없이 교사화 학생 간의 배려를 중요하게 여기는 좋은 부모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적당함을 모르는 소수의 크나큰 잘못이 아무런 죄 없는 다수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내기도, 또 이것이 부풀려져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그동안 교육이 사회를 병들게 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일지도 모르겠다. 갑질 문제는 늘 있어왔다. 하다못해 부끄럽게도 ‘갑질문화’라는 말이 들릴 정도다. 어쩌면 우리의 교육이 늘 승자와 패자, 갑과 을을 경쟁하듯 가려내며 극단적이고 뒤틀린 가치관들을 주입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도를 넘은 학부모의 태도는 이런 뒤틀린 사고관에서 탄생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그런 어른이 되어선 안되는 거 아닐까?
이젠 아이들에게 협동심과 동등함, 공존과 같은 가치관을 가르쳐할 때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선생님의 지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보호자가 선생님을 존중해야 아이도 선생님을 존중할 수 있다.(과거에는 선생님을 존경한다 표현했지만 존경심은 강요할 수 없기에 존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내 아이가 속이 상하면 내 마음도 쓰리다. 그러나 아이가 잘못을 해 선생님에게 혼나는 것이 속이 쓰리다면, 아이가 잘못하지 않도록 부모로서 내가 아이를 잘 지도한 것인지 먼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부모가 비뚤어졌다면 자식도 비뚤어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