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과연 교육을 통해 변할까? 이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 같다. 일단 나의 생각은 ‘아니요’이다. 학교를 통해 그리고 교육을 통해 사람이 변할 수 있었다면 아마 세상은 이미 유토피아였어야만 한다. 언젠가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교육이라는 게 왜 필요한 거지?”
교육을 하며 사는 내가 사람의 변화가능성을 믿지 못한다는 게 조금 그렇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는 뭐 하려 교육을 하니?
그에 대한 내 생각은 이러하다. ‘최대한 타고난 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교육을 하고 교육을 받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타고난 기질이라는 것이 있다. 간단하게는 정적인 사람이 있고, 동적인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사려 깊은 사람이 있고 유독 까칠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스스로가 가지고 태어난 것들을 잘 이해하고자 교육을 받는 것이고 또한 그를 통해 타인의 타고남을 존중하고자 교육을 하는 것이다. 최대한 상대방의 타고남을 존중하고 나도 내가 타고난 대로 살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계속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서 나에 대해 배운다. 그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것이 교육이라는 거다. 내가 가진 강점은 무엇일까, 내가 가진 천성과 기질은 무엇일까, 내가 남들에 비해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등등.
나는 매일 교육을 빙자한 잔소리를 한다. 친구들에게 다정하게 대해라, 존중해라, 집중해라,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나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긍정적인 말을 해라. 하지만 속으로 알고 있다. 내 지도를 소화할 수 있는 학생들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타고나기를 공감 능력이 부족하거나 자기 성찰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있다. 이런 감정적인 측면 말고도 타고난 학습적 지능이 부족한 친구들 또한 분명하게 있다. 물론 그 학생들이 성장하는 환경 속에서 관련된 능력이 뒤틀려져 있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저 유전자에 박혀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큰 반전이 없다고 생각을 하다 보면 나는 이 학생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쉽게 그릴 수 있다.
방법. 그 학생들과 비슷한 말과 행동을 하는 어른을 떠올리고 그 위에 조금 나이 든 학생의 얼굴을 상상해 덧붙이면 된다.
역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어떤 어른들을 말이다. 정말 인성이 좋은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이 어릴 때는 무언가 다른 모습이었을까? 정말 이기적인 동료들도 본다. 그럼 저 동료가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뭐가 달랐을까?
다양한 학생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바라보면, 특히 담임교사로서 때로는 그들 사이의 사건에 발단부터 결말까지 세세하게 참견을 하다 보면 나는 전에는 이해가 가지 않던 어떤 어른들이 생각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과 나의 학생들은 나이와 생김새만 다를 뿐 그 말과 행동에는 어떠한 유형이라는 게 있고 그 양상이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생각의 끝이 ‘그들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다!’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른들에 대한 생각은 이러한 것으로 귀결이 되겠다.
‘아, 이런 애들이 커서 그런 어른이 되는 것이구나!’
즉, 이런 아이가 이런 어른이 되는 것이고, 저런 아이가 저런 어른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본다. 교실에는 정말 많은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자라면서 정말 많은 어른들과 친구들을 만난다. 그 과정을 겪어 그런 학생들은 그런 어른들로 자란다. 내가 자주 하는 잔소리가 있다.
“애들아, 너희는 너희가 어른이 되면 갑자기 짜잔 하고 뭔가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그런데 별반 다를 게 없어. 너희가 교실에서 보여주는 모습, 너희가 지금 친구들을 대하는 모습, 그냥 그 모습 고대~~ 로 어른이 되는 거야. 너희의 지금 모습이, 너희가 어른일 때의 모습이란다. “
학생들을 보면 그 학생의 미래가 겹쳐 보인다. 이건 편견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학생들의 모습과 내가 아는 어른들의 모습을 뒤져 비슷한 모습끼리 선을 연결하면 그들이 어른일 때를 상상할 수 있다. 물론 개과천선이라는 말도 있겠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 행동이 다를지언정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천성은 똑같다고 본다. 즉,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악한 아이들은 커서 누군가를 괴롭히는 어른이 된다. 악하지 않은 아이들은 커서 누군가를 존중하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 (아닐 가능성도 농후) 이건 행동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욕을 하거나 폭력을 쓰는 아이도 악하기만 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학생이 지금 처한 상황이 본인이 타고난 기질과 다르게 행동하도록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본연의 모습을 찾는다면 전혀 달라진 모습의 어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아이의 내면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거다.
학생들을 보면 어떤 기질이 보인다. 도저히 바뀌지 않는 무언가가 말이다. 누구나에게 하나씩은 있다. 학생들을 관찰하면 그렇다. 그리고 애나 어른이나 자신이 세상에 날 때 가지고 태어난 대로 살지 않으면 불행해진다고도 생각한다. 이건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깨달은 거다. 학생들이나 어른들이나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 것들 즉,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면 불행하다. 이걸 깨달은 이후로는 무언가를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뭔가 내가 더 ‘좋다 ‘고 생각하는 대로 학생을 끌고 가는 것은 나나 학생이나 서로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나는 자꾸 조바심이 나고 학생은 자꾸 선생님이 무섭다. 쉽게 생각하자. 타고난 것을 바꿀 수 있었다면 세상은 유토피아였을 거다. 그럼에도 교사 특, 남을 가르치고 싶어 함.. 에 따라 학생들을 내가 생각하는 답으로 끌고 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생각을 한다.
‘이 아이는 이렇게 살지 않으면 죽을 팔자야.’
여기서 ‘죽을’이라는 것은 ‘불행한’이라는 말이다
자기의 타고난 본성, 기질을 거스르며 사는 것은 불행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학생들에게 ‘흡!’하고 기합을 넣어 잔소리를 하려다가도 ‘푸시’ 힘이 빠진다.
“아…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구나.”라고 서로를 ‘인정’한다면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나도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할 이유가 없다.
“저 사람은 평생 저렇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야.”
교사로서 본다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학생, 또는 보호자가 있다. 그리고 절대 안 되는 학생이나 보호자도 있다. 후자를 이해해 보겠노라고 애쓰다 보면 너무나 괴롭고 힘이 든다. 그렇다고 그들을 바꾸는 것도 계속 말했다시피 불가능하다. 쉽게 나도 바뀔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아마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교사여도 좋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나 같은 교사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간혹 나는 내게 ‘공감’을 바라는 보호자들을 만난다. 내가 썩 그들에게 공감을 안 해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은 내가 조금 더 호들갑을 떨어주기를 바란다. 학생이 아파서 결석한다는 문자에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장을 하면 그것에 상처받는 보호자들이 있다. 또는 학생이 다쳐서 밴드를 붙여줬는데 방과 후에 이런 연락이 오곤 한다. “우리 애가 다쳤는데 위로도 안 해주시고 밴드만 붙여주셨다면서요…” 이런 예시의 보호자들이 볼 때 그들은 나를 고치고 싶을 거다. 그러니까 항의를 하는 거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람인 걸. 그들이 내가 원하는 인간상의 보호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그들이 원하는 교사상의 교사가 될 수 없는 거다.
그렇다고 우리가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마 그 보호자들은 전부터 계속 그런 사람들이었을 거다. 나는 아마 계속 이런 사람이었을 거다. 이렇게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육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사람이 바뀌지 않는데 교육은 의미가 없는 거 아닐까?
우리가 교육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나를 변화시키는 방법이 아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교육의 의미는 온전한 나를 이해하는 것에 있다. 다른 사람이 ‘이래야만 해’라고 말해서 나를 거스르고 있는 나 말고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배우기 위해 교육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태어난 모습으로 나와 다른 식의 사람들과 어떻게 이 사회를 살아갈 것인지를 교육을 통해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것은 ‘나를 바꿔서’ 살아가는 게 아니다. 나답게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다음은 너답게 살도록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너는 그런 사람이구나. 학생들은 나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타인을 존중할 수가 있다. 존중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감싸는 것은 아니다. 그냥 ‘어. 너는 그런 사람’이다. 그 이후에 선택을 하면 된다.
어, 당신은 그런 사람이군요. 나는 당신과 맞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서로 등을 돌리고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집중하면 된다.
물론 그 사람이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만든다면 함께 놀면서 즐거우면 되는 거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내가 아닌 것으로 사는 것은 너무 괴롭다. 그러니 나는 그걸 강요받고 싶지 않다. 반대로 상대방도 그걸 강요받아야 할 이유는 없겠다.
너는 내가 감당할 수 없겠다. 안녕!
나는 나를 즐겁게 만드는 사람들에 집중할게!
나의 선을 아는 것.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의 선을 밟고 넘어가서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생활을 위해서 우리는 교육을 하고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