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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타 Jul 26. 2022

회자정리고 나발이고 이별은 늘 뭣 같다

좋은 이별은 없다에 로제 떡볶이 겁니다

누구에게나 남자(여자)가 한 번에 몰려오는 시기가 있듯이 요즘 나는 주변 친구들이 헤어짐을 겪는 이별기에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인생사 끼리끼리라고 내 친구들은 누구 하나 "좋게 헤어졌어~"라고 굳이 포장하며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미 떠난 인연에게 쌍욕을 하며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없어서 좋다. 아무리 남자 친구여도 나는 친구의 사생활을 굳이 작음이*에게 말하지 않는다. 온 얼굴로 궁금해 죽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냥 그렇게 됐다고 말하고 대화 주제를 넘긴다.

*작음이: 남자 친구(30대/키가 작음/진짜 작음)


작음이는 나에게 본인은 이별 후 절대 뒤돌아 보거나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냥 그 정도의 사람이었던 거고, 본인과는 거기까지였던 것일 뿐이라는데 사료(史料)에 의거하면 역시나 뻥이다.





현곤이 전학 수속도 안 끝났을 것 같은데 그리워하다 못해 앓고 있는 게 참 작음이 답다. 만남은 이별이라니 참으로 현실적이고 아픈 말이다. 문득 나에게 '가장 슬펐던 이별'은 뭐였을까 생각해봤는데 모든 이별은 슬펐고, 그 순간에는 마냥 무너졌기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별'로 수식어를 바꿔보았다. 생각해 보면 참 많은 이별을 겪었는데 오늘은 이 기억을 꺼내고 싶다.


6~7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친했던 팀 동생 J와 수다 떠는 재미로 회사를 다녔다. 후배가 아니라 동생이라 부르는 이유는 J를 회사 사람이 아닌 인간적으로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까탈스러움이 극에 달했던 그 당시, 나는 후배들이 날 언니 혹은 누나라고 부르는 게 너무나 싫었고 나 역시 누군가를 언니 혹은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회사에서 무슨 가족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왜들 저러나 싶었다. 그 선을 넘어 나에게 들어온 사람이 J다. J는 사랑스러웠다. 내가 신나는 노래를 틀면 같이 춤을 춰줬고, 드라마 주인공을 따라 하면 상대방 대사로 대화를 이어갔다. 외근이 잦은 업무라 나갔다 들어올 때면 꼭 우리가 좋아하는 빵을 사 왔고(나는 단 것을, J는 짠 것을 좋아해서 우리는 아주 다채로운 돼지의 삶을 살았다.) 함께 나눠 먹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로 깔깔댔다.


그렇게 2년가량 흐른 어느 날,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인지하고 있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신입 공채로 입사한 나와 달리 J는 파견직으로 입사했다. 당시 회사는 사원이 무려 6단계로 나눠지는(파견직▶계약직 1▶계약직 2▶(이제부터 정규직이지만 공채보다 급이 낮은)사원 1▶사원 2▶공채 신입),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구조로 짜여 있었는데 파견 계약이 끝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파견직 다음 단계는 회사 자체 계약직이었고, 고용 형태의 특성상 계약직 재계약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J는 모난 돌처럼 여기저기 부딪히는 나와 달리 주어진 일 이상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누구와도 얼굴 붉히지 않고 둥글게 해결할 줄 아는 친구였다. 무엇보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정규직 전환을 매 계약 시점마다 마음 졸이며 주기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역량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과는 그 어떤 애틋함이나 끈끈함이 없었기에 나에게 J 없는 회사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붙잡고 싶었고, 누가 뭐래도 붙잡을 생각이었다.


"언니, 우리 잠깐 쉬고 올까?"라는 그녀의 메신저를 받고 휴게공간으로 향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니, 그냥 아니야."라고 입을 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늘 그랬듯이 J는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언니, 나 그만 두기로 했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단언컨대 이때 느꼈던 상실감과 절망은 만났던 남자 친구와의 이별에서 느꼈던 것과는 결이 달랐다.

"언니는 조금 있으면 대리를 달고 과장이 될 텐데 난 언니가 그렇게 쭉 성장할 동안 계속 사원일 거야. 언니를 좋아하지만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아."


일단 내가 대리 진급에서 두 번이나 물을 먹었기 때문에 J의 말은 틀렸지만 그 뒤 이어진 모든 말은 옳았다. J는 안정적으로 행복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고,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뒤 우리는 약 한 달 정도 더 함께 했고 J는 회사를 떠났다. J가 로비를 걸어 나가던 그날,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울고 돌아다녔다. 나는 이 회사가 싫다고, J가 뭘 잘못했길래 가야 하냐고 정말 서럽게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제 이런 식의 헤어짐에는 익숙한 그저 그런 사회인이 되었다. 여전히 부조리한 회사의 룰에는 반기를 들며 온 몸으로 싫은 티를 내는 옹졸한 사회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번 질질 짜지는 않으니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더 강한 임팩트가 있는 일들도 많았지만 굳이 되새기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많은 기억 중 가족들과의 이별 기억이 아직 없음에 한 없이 감사해진다. 할머니한테 전화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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