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도 아는 사람이 있고 저기에도 아는 사람이 있는 작음이*와 달리 나의 인간관계는 한정적이다.
*작음이: 남자 친구(30대/키가 작음/내가 예쁘게 눈썹 다듬어 줌)
단체로 어디엔가 묶여있다는 것도 싫고 카톡방을 굳이 여러 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용건이 끝나면 그 방을 나온다. 이런 성향의 내가 벌써 n년째(명확하게 쓰고 싶은데 까먹은 거 맞음) 지속하고 있는 단톡방이 <알로하>다.
알로하에는 서로 다른 네 여자가 소속되어 있고, 우리는 하와이에서 만났다. 이렇게 쓰고 나니 꽤 흥미로운 떡밥인 것 같아서 여기서 이만 줄여야겠다... 는 장난이고 우리는 회사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호스트였고, 다른 셋은 초대를 받은 각 회사의 대표 직원이었다. 안 맞는 사람들을 한 공간에 욱여넣어놔도 친해질 수 없듯이,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이끌려 어느 순간 붙어 다니고 있었다. 대상이 이성이었다면 굉장히 로맨틱했을 텐데 여자 넷의 모임은 박터지는 수다와 쇼핑의 향연으로 이어졌다. 함께해 온 시간만큼 쌓인 추억도 많기 때문에 알로하와의 이야기는 나중에 별도로 다룰 듯 하지만 짧게 각 캐릭터를 좀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이너프킴 | 어디 사라졌다 싶으면 쇼핑을 하고 있어서 "언니 충분해 그만해 진짜 이너프야." 하다가 이너프킴이 됨
* 김관세 | 명품백 사고도 숨기고 들어오는 사람들 태반인 흉흉한 세상에 홀로 정직하게 관세 기준도 안 넘는 물건을 신고하다가 김관세가 됨
* 최코코 | 단체 사진을 찍는데 낸시랭의 코코샤넬처럼 내 어깨에 턱을 새초롬하게 얹고 있어서 "이거 모야 코코샤넬이야 모야" 하다가 코코가 됨
* 나 | 이 모든 별명의 창시자
약 일주일간의 파라다이스를 보내고 온 우리의 단톡방 무드는 놀라우리만큼 달라져 있었다. 'ㅋㅋㅋㅋ'가 난무했던 방은 'ㅎ...'로 바뀌었고,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났다. 현대 어른의 삶으로 복귀한 것이다.
일기 쓰기 싫다고 일기에 쓰는 게 코미디
사료를 보아하니 과거 저 어린이 역시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 해낸 듯하다. 북조선은 일기를 쓰지 않을 것 같으니 날래 가보라고 권해야겠다.
너프언니와 코코는 회계를, 관세언니는 법무를, 나는 마케팅을 하고 있었지만 여기나 거기나 곡소리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수십 번 말해줘도 같은 것을 묻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일하러 온 것일 텐데 일 빼고 다 하는 사람들도 산재되어 있었다. 답 없는 일을 줘놓고 답을 내놓으라는 사람에게는 내가 니 아버지냐 정답을 왜 나한테 묻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영혼 없는 눈으로 주어진 일을 처리했고, 출근길부터 퇴근만 기다리며 하루를 시작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사는 건 짐승 새끼라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 들었는데, 가끔은 짐승 새끼의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고 지지하며 고비를 넘겨왔다.(라고 썼지만 사실 그냥 욕 나오면 욕하고, 듣고 있던 사람이 더 화나서 더 욕해주고 그러다 보니 기분이 좀 풀리는 뭐 그런 나날들의 연속) 처음 만났을 때 미혼이었던 언니들은 가정을 이뤘고(심지어 둘 다 연하랑 결혼함 세상에) 나와 코코 역시 좋은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 제법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힘들 때 하와이에서의 기억을 소환하며 잠시나마 리프레시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참 웃긴 게, 우리 넷은 그 싫은 회사 일 덕분에 모이게 되었다는 거다. 가장 좋아하는 옛 말이 화무십일홍인데 알로하를 통해 다시 한번 그 말이 맞다는 것을 느낀다. 영원한 것, 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누가 봐도 부러운 삶을 사는 사람도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이고, 남들에게는 힘들어 보이는 인생이 당사자에게는 빛날 수 있다. 죽을 듯이 힘든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나고, 변치 않을 것 같던 순간이 나도 모르게 바래져 있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현재에 충실하려고 한다. 과거는 손쓸 수 없고, 미래는 알 수 없기에 바꿀 수 있는 건 지금 뿐이다. 이렇게 말하니 굉장히 철두철미한 삶을 사는 것 같은데 이 글을 다 쓰고 노트북을 덮고 나면 크로플을 기다리며 드러누울 예정이다.
하고 싶지 않은, 피하고 싶은 일이 나중의 나에게 어떤 형태로 되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나면 그 결과가 어떻든 적어도 후회는 없다. 우리 모두가 먹고, 자고, 웃고, 울고, 사랑하는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멋진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