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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타 Sep 27. 2022

엄살쟁이와 연애하기는 제법 재밌다

가끔씩 먼 산을 응시하게 된다는 게 함정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엄살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주사 맞는 것을 겁내지도 않았고, 채혈하는 모든 과정을 침착하게 지켜봤다. 아프다고 말한다고 해서 안 아파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꽤 오래전부터 해왔던 기억이 있다.


반면, 작음이*는 작은 고통에도 크게 반응한다.

*작음이: 남자 친구(30대/키가 작음/최근 이직에 성공하여 마스크 속으로 늘 배시시 웃고 있음)

눈이 뻑뻑하면 조용히 인공눈물을 넣고 돌아오는 나와 달리 어우 눈이 왜 이러냐며 이게 한동안 안 그랬는데 머리도 아픈 것이 확실히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다는 말을 시작으로 안구 건조로 인해 겪었던 지난날의 이야기보따리를 펼친다. 얼마 전에는 기억력이 확실히 떨어진 게 아무래도 나이가 들긴 드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는데, 자신의 총명했던 과거를 놓아줄 수 없었던 작음이는 뇌 영양제(정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열심히 복용 중이다.


몇 달 전, 자고 일어난 작음이의 베개가 피로 물든 적이 있다. 귓바퀴에 피가 고인 것으로 보아 귀에 문제가 생긴 듯했고, 나라 잃은 얼굴의 작음이는 한쪽 손으로 귀를 움켜쥔 채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약 40분 후, 오두방정을 떨며 돌아온 작음이는 "히히 어제 샤워하다가 귀를 너무 세게 팠나봥 이렇게 오는 사람들이 많대 히히"하며 지구 내핵까지 떨어져 있던 컨디션을 빛의 속도로 회복했다.




작음이의 순산을 기원합니다.


기관지가 약한 작음이는 어린 시절부터 감기를 달고 산 모양이다. 아픈 김에 일기도 쉬어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분해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 것이다. 나는 감기를 포함한 잔병치레가 많지 않았다. 호기로운 성격답게 한번 아프면 크게 아프다.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좋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엄마의 케어 덕분에 착실히 약을 먹고 정기 검진을 다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지난 3년 간의 노력이 성인이 되고 자유를 빙자한 방탕한 삶을 살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담당 교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약 일주일 동안 많은 검사를 진행했다. 본 게임에 들어가기 전부터 병원은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이지만 실은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엄마는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반복하며 수술 중 사망 동의서에 서명을 했고, 나는 전신마취를 한 채 약 7시간가량 수술대에 올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는 수술 중반쯤 함께 대기하던 옆자리 보호자들이 "어우 저 박현타 환자는 무슨 수술이길래 아침에 들어갔는데 여태 안 나와?" 하는 말을 듣고 온 몸이 굳은 채로 앉아 있다가 교수님의 호출을 받았고, 떼어낸 조직이 악성은 아니니 안심하시라는 선생님의 말에 긴장이 풀려 주저앉았다고 한다.


마취가 풀리니 아프다는 말도 안 나올 만큼 아팠다. 평생 처음 겪어 본 고통이었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해서 화장실에 가기도 어려웠던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의 도움이 필요했고, 내 맘 같지 않은 몸과 답답한 병실, 이유 모를 속상함에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짜증을 냈던 것 같다. 무조건적으로 내 편이었던 엄마도 시간이 지나며 점점 지쳐갔고, 서로 예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구와도 함께 하고 싶지 않다는 입원 초기의 마음은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고, 난생처음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6인실로 병실을 옮겼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뚜렷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병실에서의 기억은 매우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병실의 막내(라고 하기도 뭐할 만큼 2~30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남)로써 재간둥이처럼 개인기를 펼치며 이모들을 웃겨드렸고, 너 때문에 배 꿰맨 거 다 뜯어지게 생겼다는 사랑 가득 담긴 핀잔을 들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데면데면했던 엄마와 내 사이를 풀어준 건 오리 진흙구이였다. 긴 기다림 끝에 일반식을 먹을 수 있게 된 날, 엄마는 병실 식구들 모두 나눠먹을 수 있는 양의 오리고기를 사 왔다. 서로의 잘못을 이야기하거나 쭈뼛대며 사과하는 단계 없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관계를 회복했다. 아마 엄마는 나보다 더 무서웠을 거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식이 아픈 상황에서 해줄 수 있는 것도, 기댈 곳도 없을 테니 말이다. 역시 사람은 나이를 좀 먹어야 철이 드나 보다. 딸내미가 크게 한번 액땜했으니 엄마는 아프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산, 오래오래 건강하게 다닐 수 있도록 예쁜 등산화나 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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